주간동아 1155

2018.09.12

풋볼 인사이트

김학범 감독이 뽑은 의외의 선수 아시아경기 축구 2연패의 묘수

  • 입력2018-09-11 1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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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축구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김학범 감독. [동아DB]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축구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김학범 감독. [동아DB]

    따져보면 한국 축구가 아시아경기를 집어삼킨 일은 극히 드물다. 고(故) 이광종 감독이 안방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아경기에서 우승한 게 28년 만이었다. 김학범 감독이 뒤를 이었다. ‘도전하는 챔피언’이란 슬로건을 달고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에 나선 대표팀은 대회 2연속 제패에 성공했다.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무엇보다 금메달 획득 시 주어지는 ‘병역 혜택’이 크다. 한국 축구는 기로에 서 있었다.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 최정상급 측면 공격수로 거듭난 손흥민에게도 병역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라고는 하나, 축구선수로 보낼 전성기와 입대 시기가 겹치는 것만큼 야속한 일도 없다. 영국 ‘BBC’ ‘가디언’ 등 유력 매체가 아시아경기 내내 손흥민의 속사정을 다룬 것도 이 때문. 이제는 홀가분해졌다. 손흥민뿐 아니라 황희찬, 이승우 등 유럽에서 활약하는 기대주들도 더 펄펄 날 수 있게 됐다. 

    사실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김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건 고작 반년 남짓이다. 대한축구협회에서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감독선임위)를 주도하는 김판곤 위원장이 칼을 빼 든 결과다. 1월 중국에서 열린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은 적잖이 부끄러웠다. 김봉길 감독이 최선을 다해 4위라는 성적을 냈으나, 내용은 기대치보다 훨씬 아래였다. 김판곤 위원장 이하 감독선임위는 감독직을 전면 재검토했다. K리그 명장 출신이 여럿 거론된 가운데, 김 감독을 최종 낙점했다. 김 감독은 공개석상에서 “자신이 없었으면 감독을 안 맡았다. 시간?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속내는 안 그랬다. 소문난 애연가인 김 감독은 줄담배를 태우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소집 몇 번 못 하고 바로 실전이다.” 

    그랬던 그가 세 가지 승부수로 과업을 해치웠다. 하나는 인맥 논란에도 데려간 황의조이고, 다른 하나는 천재 미드필더로 재림한 황인범이며, 마지막 하나는 파격적 포지션 변경을 강행한 김진야와 김문환이다.

    인맥축구 오해, 성적으로 해결

    이번 아시아경기 축구에서 총 9골을 넣어 우승의 주역이 된 황의조.(왼쪽) 한국 축구대표팀의 허리 역할을 확실히 해준 황인범. [동아DB]

    이번 아시아경기 축구에서 총 9골을 넣어 우승의 주역이 된 황의조.(왼쪽) 한국 축구대표팀의 허리 역할을 확실히 해준 황인범. [동아DB]

    지난달 중순으로 돌아가보자. 김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축구회관 대회의실 단상 앞에 앉았다. 이민성, 김은중 코치 등과 함께 아시아경기 최종 명단을 공개했다. 병역이 달린 만큼 월드컵 못지않은 관심이 쏠렸다. 현장을 가득 채운 취재 기자와 방송 카메라 수가 이를 증명했다. 



    김 감독은 질의에 앞서 모두발언에 응했다. 통상 기자회견 전체를 아우르는 도입부 정도로 보면 된다. 본 경기에 앞서 간단히 몸을 푸는 수준이랄까. 김 감독은 뜻밖의 일장연설을 펼쳤다. 준비한 종이를 편 그는 취재진이 던질 질문에 미리 답했다. 꼬투리를 잡힐 대목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였다. 먼저 “황의조 발탁과 관련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반대 여론에 맞섰다. 선수단을 엄하게 다루는 호랑이인 동시에, 섬세한 접근과 뜻밖의 수로 차이를 만들어내곤 한 여우였다. 

    김 감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석현준이 아니고 황의조냐’라는 말이 있을 것으로 안다”던 그는 “나는 학연, 지연, 의리 이런 게 없다. 내가 그런 바탕에서 살아 올라왔기 때문이다. 어떤 지도자가 성적을 목전에 두고 그런 선택을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당연히 시선이 곱지 않았다. 최근 한국 축구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인맥’이다. ‘실력’보다 ‘이해관계’가 앞서 팀 전력을 해친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성남FC 감독 시절 연을 맺은 제자 황의조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으니 팬들 심기가 어디 편했을까. 

    사실 우리는 황의조의 최근 행보를 잘 몰랐다. 대다수가 ‘황의조가 일본 J리그에서 골 좀 넣는다더라’는 짤막한 기사로 어림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J리거가 대표팀에 발탁돼 재미를 본 경우가 많지 않다. 황의조의 개인 성과가 괜찮을지라도 기존 공격수와 얼마나 큰 시너지 효과를 낼지도 미지수였다. 더욱이 소속팀 감바 오사카가 리그 최하위권이라는 점 역시 황의조에 대한 신뢰를 깎아내렸다. 김 감독이 이런 벌집을 스스로 건드렸다. “유럽파 공격수들의 합류가 늦다. 조별리그에서는 황의조가 역할을 해줄 것”이라며 추가 설명을 내놨다. 단호한 성정을 갖춘 김 감독이지만,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장 분위기는 어쩌면 주눅 들어 변명하는 청문회 같았다. 

    팬들도 일단은 ‘황의조=조별리그용’으로 규정하며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이 선수를 안 뽑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황의조는 조별리그 1차전 바레인과 경기에서부터 해트트릭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백미는 8강 우즈베키스탄전이었다. 이날도 해트트릭을 작렬한 황의조는 결승골이 된 페널티킥까지 직접 얻어냈다. 일본전, 베트남전 등에서 선보인 움직임은 얼마나 날카롭던지. 슈팅 임팩트는 또 얼마나 정확하던지. 김 감독이 대회 직전 야심차게 내보인 병기는 대성공이었다. 감독이 선수를 지켰고, 선수가 다시 감독을 지켰다.

    아는 사람만 알던 믿고 쓰는 플레이메이커

    이번 아시아경기가 더더욱 눈길을 끈 건 역대에 남을 화려한 공격진 덕. 손흥민은 물론, 유럽에서 뛰는 특급 공격수들이 자리를 채웠다. 상대적으로 생소할 수 있는 나상호는 고교 시절 황희찬의 라이벌로 이름을 떨친 공격수다. 현재 광주FC 소속으로 K리그2 득점 1위다. 

    또 황인범이 있었다. 골 맛 좀 봤다는 공격진 사이에 조금은 낯선 자원일 수 있다. 짧게 자른 머리는 군인 신분이라 그렇다. 아산무궁화프로축구단에서 복무 중이다. 그런데 이 선수가 에이스를 상징하는 등번호 10번으로 쟁쟁한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김 감독의 모두발언을 다시 짚어보자. 대표팀 최종 명단에는 여러 이슈가 있었는데, ‘백승호-이강인 제외’ 역시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백승호는 햄스트링 파열 후유증이 있었고, 이강인은 사전 훈련을 해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발목이 잡혔다. 김 감독은 “안타깝지만 2년 뒤 도쿄올림픽에서 큰 힘이 돼줄 선수들”이라고 제외 배경을 알렸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게 황인범이다. 대표팀 중심으로 축구를 살피는 팬들에게는 ‘대체 누구기에 백승호와 이강인을 밀어냈느냐’는 의심을 받을 법했다. 김학범호 1기부터 꾸준히 얼굴을 내비쳤음에도 상대적 이름값에선 뒤떨어졌다. 

    황인범은 비슷한 연령대 선수 가운데 최고 테크니션으로 꼽힌다. 2012년 당시 황희찬, 황기욱, 윤용호 등과 AFC U-16 챔피언십에 나섰다. 아시아권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낸 것도 아니지만, 이 대회를 거친 선수들이 현재 K리그 곳곳에 포진돼 한국 축구의 미래로 통한다. 황인범의 천재성은 그때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중계방송을 챙겨 본 마니아들의 눈길을 확실히 끌었다. 황희찬이나 나상호처럼 득점이란 지표로 평가가 안 돼 입소문을 덜 탔을 뿐. 이들이 골을 넣으려면 슈팅 상황을 만들 황인범 같은 연출가가 필수다. 분류하자면 ‘피니셔’보다 ‘플레이메이커’ 유형에 가깝다. 황인범은 충남기계공고(대전시티즌 U-18) 졸업 직후 대전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했다. 앳된 얼굴로도 K리그를 몇 년씩 뛴 선수처럼 능숙하게 경기를 풀었다. 

    황인범의 몸 상태가 늘 좋았던 건 아니다. 5월 말 2차 소집 훈련 당시에는 연습경기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황인범을 귀히 여겼다. 4-2-3-1 형태를 주력으로 택하면서 주가는 더욱 올라갔다. 이 포메이션이라면 최전방 공격수 바로 아래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황인범도 기대에 부응했다. 중요한 경기마다 그 자리에 배치된 황인범은 남다른 창의성으로 상대 수비벽을 무너뜨렸다. 우승 덕에 일경 신분으로 조기 전역. 그뿐 아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부임한 성인 대표팀에도 선발됐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아시아경기에서수비수로 포지션 전환에 성공한 김문환(왼쪽)과 김진야. [뉴스1]

    아시아경기에서수비수로 포지션 전환에 성공한 김문환(왼쪽)과 김진야. [뉴스1]

    산전수전 다 겪은 김 감독도 쉬이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시간에 쫓겨 팀을 급히 조립하다 보니 부품이 제대로 없었다. 포화 상태인 공격진, 미드필더진과 달리 수비진은 인력난에 시달렸다. 중앙 수비수는 그나마 쓸 수 있는 자원이 있었다. 하지만 측면 수비수는 아니었다. 사석에서 “사이드백이 없어 정말 큰 고민이다. 어떻게든 만들어야 하는데”라며 고심하던 김 감독의 주름이 더욱 깊어 보였다. 

    현대 축구에서 측면 수비수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수비만 잘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수비는 당연히 잘해야 하고, 공격 옵션도 될 수 있어야 한다. 중앙 수비수와 중앙 미드필더가 후방을 지킬 때 측면 수비수가 깊이 올라 상대 옆구리를 찔러야 한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를 3년 연속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가 마르셀로, 다니엘 카르바할 같은 세계적 선수를 보유한 건 우연이 아니다. 

    김 감독은 파격적인 수를 던졌다. 기존 측면 수비 자원을 외면했다. 이어 전문 자원이 아닌 선수들의 포지션 변경을 추진해 본인 입맛에 맞게 직접 키우려 했다. 그렇게 눈에 든 선수가 좌 김진야, 우 김문환이다. 김진야는 이승우와 동년배로 2015 FIFA U-17 월드컵에서 이름을 날렸다. 당시에도, 현 소속팀 인천유나이티드에서도 그는 측면 공격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왼쪽 측면 수비수로 변신했다. 100%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왼발을 잘 쓰는 왼쪽 측면 수비수가 아닌 터라 크로스 등 공격 패턴에 한계가 보였다. 하지만 이번 대회 한국 대표팀 전체 경기를 소화하는 괴력을 과시했다. 힘들 법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뛰어줬다. 

    오른쪽은 김문환이다. 그 역시 처음부터 수비수는 아니었다. 중앙대 시절, 그리고 부산아이파크 입단 초기만 해도 공격 옵션으로 기능했다. 김문환을 측면 수비수로 처음 세운 게 김 감독은 아니다. 신인 공격수가 프로팀 주전 자리를 따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고(故) 조진호 감독이 “측면 수비수로 한번 서보라”고 권유했다. 김문환은 좌우를 안 가리고 뛰면서 적응력을 키웠다. 김 감독은 김문환을 국제무대에 올려 가능성을 인정받게 했다. 김문환 역시 황인범 등과 함께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기다리는 중이다. 30대에 접어든 포지션 경쟁자들의 나이를 떠올리면 국가대표 붙박이 오른쪽 측면 수비수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선수들이 잘해줬다. 축구 인생이 걸린 만큼 더없이 절박했다. 최후의 한판인 일본과 결승전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엔 김 감독의 승부수와 지략이 깔려 있었다. 공부하는 지도자로 유명한 그는 선수 특성을 세세히 파악한 뒤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축구팬들이, 심지어 일선 지도자들까지 갸웃하던 노림수로 아시아경기의 여정을 책임졌다. 어쩌면 이런 감독을 선사한 감독선임위까지 갈채 받아 마땅한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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