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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좋아 홈캉스지, 어쩔 수 없이 칩거”

젊은 직장인 휴가 내도 경제적 여유나 시간 부족으로 집에 ‘콕’

“말이 좋아 홈캉스지, 어쩔 수 없이 칩거”

“말이 좋아 홈캉스지, 어쩔 수 없이 칩거”
“휴가를 어디로 갈 거냐는 상사의 질문에 태국에 간다고 답했다.” 

5년 차 직장인 고모(31) 씨의 말이다. 그러나 고씨는 이번 휴가 때 공항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휴가기간 내내 서울 영등포구의 자취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입사 첫해를 제외하고는 휴가 때 한 번도 휴양지를 찾은 적이 없다. 해외 유명 휴양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일이 너무 바빠 여행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평소 운동은커녕 병원 갈 시간도 부족해 건강이 좋지 않다 보니 여행보다 휴식이 필요했다”고 밝혔다. 

고씨처럼 휴가 기간 여행보다 집이나 인근 호텔에 머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언론에선 이들을 ‘홈캉스족’ ‘호캉스족’이라 부르며 젊은이들의 새로운 트렌드라고 소개한다. 굳이 번잡한 휴양지에서 바쁘게 돌아다니기보다 집에서 우아하게 힐링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상당수는 자발적 홈캉스족이 아니다. 일이 너무 바쁘거나 돈이 없어 여행을 떠날 여유가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직장인이 모처럼의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이었다. 직장인교육 전문기업 휴넷이 직장인 1106명을 대상으로 올해 여름휴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16.3%가 여름휴가를 포기했다고 답했다. 휴가를 가지 않는 이유로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라는 응답과 ‘다른 기간에 휴가를 사용하겠다’는 응답이 각각 25.6%로 공동 1위였다. 이어 ‘회사 업무가 많서’(13.3%), ‘주변에 휴가 쓰는 사람이 없어서’(5.6%), ‘회사 사정이 어려워 눈치가 보여서’(3.3%) 순이었다.


“휴가도 돈이 있어야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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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의왕시의 김모(32) 씨도 여행자금이 모자라 휴가 여행을 포기했다. 그는 “급여는 올랐지만 수당 등을 받지 못해 올해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동료들의 휴가에 맞춰 연차휴가를 내긴 할 테지만, 여행비용이 부족해 쉬는 기간 내내 집에서 게임이나 원 없이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프로그램 개발 업계에 종사하는 김씨는 업무 특성상 야근이 잦아, 지난해까지는 야근 및 주말근무수당을 쏠쏠히 받았다. 하지만 올해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퇴근시간이 되면 회사 내 전원이 꺼진다. 집에 가서 남은 일을 처리하지만, 일단 퇴근했으니 야근수당을 받는 것은 꿈도 못 꾼다. 김씨는 “결국 일은 줄지 않고 급여만 줄어 올해 초 계획했던 휴가를 취소했다. 상여금이라도 받으면 휴가를 가려고 했는데 회사가 자금 문제로 상여금을 내년 초 지급하겠다고 해 여행도 미뤘다”고 밝혔다. 

비단 김씨뿐 아니라 많은 직장인의 주머니 사정이 지난해에 비해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이 8월 23일 발표한 ‘2018년 2/4분기 소득10분위별 가구당 가계수지’에 따르면 근로자가구의 경우 소득분위 1~3분위의 근로소득이 전부 감소했다. 4분위 근로자가구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318만4567원으로 지난해 동분기(311만6704원)에 비해 소폭 늘었다. 하지만 처분가능소득은 같은 기간 293만2638원에서 284만762원으로 감소했다. 처분가능소득이란 개인소득에서 사회보장분담금, 이자비용 등 고정 지출분을 뺀 비용을 말한다. 지난해에 비해 연봉은 올랐어도 급여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줄었다는 얘기다. 

다른 직원들에 밀려 휴가를 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7월 13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대체근무자가 없어 휴가를 낼 수 없다는 중견기업 공장 근무자들의 청원이 올라왔다. 이들은 게시물에서 ‘공장이 대체근무자를 지정하지도 않고, 연차를 사용하겠다고 휴가원을 내도 받지 않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탄력적으로 운영하게 해주거나 기업에 신규채용을 강제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청원했다. 비단 이 공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업계 관계자는 “인력이 비교적 충분한 대기업과 달리 생산직종은 대부분 교대 인력이 모자라 직원들이 휴가를 가지 못하는 문제를 겪고 있다. 닷새 휴가는 꿈도 못 꾸고 2~3일 짧은 휴가만 겨우 갈 수 있는 정도”라고 밝혔다.


“피곤해서 아무 데도 못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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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낼 수 있고, 여행을 떠날 금전적 여유도 있지만 집을 나서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일에 치여 혹사한 몸으로 여행을 떠날 여력이 없다는 것. 서울 양천구의 박모(32) 씨는 이번 휴가를 ‘여름잠 기간’으로 잡았다. 그는 “입사 5년이 지났고 후배도 많이 생겼지만, 여전히 사내 ‘무수리’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회사에 폐는 끼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려다 보니 일에 들이는 시간이 많다. 게다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상사들의 크고 작은 요청을 하나둘 들어주다 보면 잠잘 시간도 모자란다. 평일에는 길면 하루에 5시간가량 자고, 모자란 잠은 주말에 몰아 잔다. 그래도 항상 잠이 부족해, 지난번에는 지하철에 서서 조는 모습을 보고 앞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자리를 양보해주려고 하셨다”고 말했다. 

4월 인터넷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773명을 대상으로 ‘수면 실태’를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5.7%가 수면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객관적 기준으로 수면 부족 실태를 분석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근로자의 하루 평균 8시간보다 적게 자는 직장인은 응답자의 93%에 달했다. ‘매일 6시간 정도 잔다’고 응답한 사람(42.3%)이 가장 많았고, ‘7시간’(24%) ‘5시간’(21.8%)이 뒤를 이었다. 

대부분 스트레스나 회사 일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8.8%(복수응답)는 ‘스트레스로 깊게 잠들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물론 ‘TV 시청,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쉬다 잘 시간을 놓쳐서’라고 응답한 사람도 33.5%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하지만 뒤이어 ‘통근 거리가 멀어서’(28.3%), ‘과중한 업무로 야근이 잦아서’(25.2%), ‘회식 등 회사 일로 귀가가 늦어서’(16.2%) 등 회사 업무와 관련된 응답이 많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상당수 직장인이 업무 과다로 자신이 하는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 쉽게 여행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휴가를 요양에 쓰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수면 부족을 넘어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직장인도 많았다. 직무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정신적·신체적 피로감으로 무기력증, 자기혐오 등에 빠지는 것을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한다. 6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는 한국 직장인 5419명과 미국 직장인 1만1487명을 대상으로 번아웃 증후군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미국 직장인의 경우 응답자의 57.2%가 ‘최근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설문 응답자의 소속 회사별로 번아웃 증후군 경험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핀테크(금융+기술) 신용등급 무료조회 기업인 ‘크레디트 카르마’가 70.73%로 1위에 올랐다. 한편 한국은 전체 응답자의 89.7%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4년 차 직장인 이모(27·여) 씨는 최근 한 달 휴가를 받았다. 6개월간 주말도 없이 비자발적 재택근무까지 해가며 진행한 프로젝트가 성공리에 막을 내렸기 때문. 휴가가 긴 만큼 여권을 챙겨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지만, 이씨는 비행기는커녕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일단 회사에는 한 달간 일본 여기저기를 자유여행할 거라며 두루뭉술하게 얘기해뒀다. 휴가 시작과 동시에 휴대전화를 비행기 탑승 모드로 해놓고 칩거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가까운 곳으로라도 여행을 가려면 숙소나 교통편 등을 알아봐야 하는데, 계획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일처럼 느껴진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지내는 ‘뇌 디톡스’가 필요하다. 안 그러면 한 달 후 다시 시작될 회사생활을 버텨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휴가 내고 병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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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내고 병원을 찾는 사람도 많다. 직장인 오모(33) 씨는 올봄 닷새가량 휴가를 내 병원을 찾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오래 앉아 있다 보니 항문 질환으로 고생하게 된 것. 그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몸에 이상이 생겨 반차를 내 병원을 찾을까 했다. 그러나 업무가 너무 바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출혈이 있던 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상사에게 반차를 내 병원에 다녀와도 되느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상사는 ‘스트레스 받으면 가끔 그럴 수 있다. 나중에 통증이 심해지면 그때 다녀와도 늦지 않다’며 말렸다. 물론 몹시 바쁠 때라 손 하나라도 비는 게 아쉬운 상황은 이해됐지만 막상 이렇게 휴가를 내 수술을 받게 되니 손해를 보는 느낌”이라고 밝혔다. 

굳이 오씨가 아니더라도 직장인 대부분이 건강 문제로 중·장기간 수술 및 입원을 하게 되면 사규에 따라 연차를 먼저 사용한다. 현행법상 업무상 재해로 요양하는 경우에만 유급 휴가 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병가로 쉬는 기간을 보장받을 수는 있으나 이 기간을 유급 휴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규는 없기 때문. 공무원과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병가를 무급 휴가로 처리한다. 그래서 유급 휴가인 연차를 먼저 사용해야 쉬는 기간에 임금이 낮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유급 병가 규정이 있더라도 이를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경기 용인시의 장모(33) 씨는 “지난해 겨울 장염이 심해 병가를 낼까 했지만, 인사고과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어 연차를 써 요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급 병가 사용을 마냥 독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업무 외 질병이나 부상까지 전부 유급 휴가로 처리하면 사용자에 대한 지나친 규제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주간동아 2018.09.12 1155호 (p44~47)

  •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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