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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

열여섯 소년의 풋사랑이 담긴 컴필레이션 테이프

영화 ‘가디언즈…’의 ‘Awesome Compilation’

열여섯 소년의 풋사랑이 담긴 컴필레이션 테이프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한 장면. 주인공 피터 퀼(크리스 프랫 분·가운데)이 허리춤에 워크맨을 차고 있다. [사진 제공 · IMDB]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한 장면. 주인공 피터 퀼(크리스 프랫 분·가운데)이 허리춤에 워크맨을 차고 있다. [사진 제공 · IMDB]

얼마 전 뒤늦게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봤다. 주인공 피터 퀼은 1980년대 초반 외계인에게 납치됐고, 이후로도 워크맨(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과 엄마가 녹음해준 ‘Awesome Compilation’이라는 녹음테이프를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그 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다. 

거실에 있던 전축으로 온 가족이 음악을 듣는 생활에서 나에게 워크맨이라는 게 생기는 경험, 음악이 온전히 ‘개인의 것’이 되는 순간의 황홀감, 그리고 마치 디제이가 된 양 자신만의 녹음테이프를 만드는 뿌듯함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테이프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일은 음악을 많이 듣는 자에게 주어진 일종의 특권과도 같았다. 영화를 보며 나는 1989년 말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나에게 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지는 않는다. 가열 찬 투쟁과 뜨거운 함성, 벅찬 민주화의 열기. 빡빡머리로 교실에 갇혀 지내던 ‘중고딩’에게 제도권 교육의 포스는 너무 강력해 그런 걸 체험하기란 불가능했다. 또래의 헤비메탈 마니아, 즉 ‘메탈파’가 대부분 그랬듯, 방구석에 처박혀 ‘판’(LP반)을 틀어놓고 음악 잡지나 음반 해설지를 읽는 것. 오타쿠 인생의 시작이었다. 

사춘기의 강력한 리비도도 하늘을 찔렀다. 음악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연애에 대한 갈망도 컸다. 짝사랑하던 여학생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살았다. 우리 학교는 마포구 합정동이었다. 그녀를 따라 목동행 버스에 몸을 싣고 그녀가 내릴 때까지 묵묵히 지켜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록 오타쿠’의 필살기가 담긴 테이프

스키드 로(왼쪽)와 앨범 ‘I Remember You’ 재킷. [사진 제공 · 스키드 로 공식 홈페이지]

스키드 로(왼쪽)와 앨범 ‘I Remember You’ 재킷. [사진 제공 · 스키드 로 공식 홈페이지]

이렇게 쓰니 왠지 스토커 같지만 절대 그렇지는 않았다. 말 한 마디 걸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겨울방학이 시작되려 했다. 태어나 용기라는 걸 처음으로 부렸다. 어느 때보다 드높은 정열이었다. 공테이프 5개를 샀다. 하나에 60분, 달달한 록발라드를 모아 꽉 채워 녹음했다. 300분을 가득 채웠다. 



이건 2000년대의 CD 굽기, 나아가 최근의 카카오톡으로 유튜브 링크 보내기와는 차원이 다른 정성이 필요하다. 순서도 미리 맞춰놔야 하고 녹음하다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꽉꽉 채우려면 개별 곡의 러닝타임도 확인해놔야 한다. 무엇보다 테이프 껍데기에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일일이 곡 제목을 써야 한다. 녹음은 실패 후 재시도가 허용되지만, 표지 제작은 실수가 허용되지 않아 미리 노트에 연습까지 하는 수고가 필수였다. 

게다가 당시 갖고 있던 LP와 카세트테이프만으로는 약 80곡에 이르는 레퍼토리를 채울 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학교 메탈파 우두머리의 집에 살다시피 하면서 좋은 노래가 있으면 잽싸게 녹음한 후 구박받기를 일주일. 모진 수모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동네마다 있던 레코드 가게에서는 히트곡만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신청곡을 녹음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카세트테이프 하나에 3000원 정도를 내면 원하는 곡으로 채워줬던 것이다. 이 카세트테이프에서 다른 테이프로 녹음하면 음질의 열화가 일어났지만, 꼭 있으면 좋을 노래들은 이를 무릅쓰고 동네 레코드 가게의 누나에게 신세를 졌다. 내 정성이 엿보였는지는 모르지만, 누나는 그날따라 LP가 아니라 CD에서 녹음을 해줬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개념도 희미한 때였지만 CD에서 녹음한 노래가 LP보다 음질이 훨씬 좋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건스 앤드 로지스(오른쪽)와 앨범 ‘patience’ 재킷. [사진 제공 · 건스 앤드 로지스 공식 홈페이지]

건스 앤드 로지스(오른쪽)와 앨범 ‘patience’ 재킷. [사진 제공 · 건스 앤드 로지스 공식 홈페이지]

무릇 이런 자체 제작 컴필레이션에도 그 나름의 타이틀곡이 있는 법. 당시 라디오에서도 대히트를 쳤던 스키드 로의 ‘I Remember You’와 건스 앤드 로지스의 ‘Patience’가 주인공이었다. 그때 음악 들었던 사람치고 이 노래로 여자를 꼬일 생각을 안 해봤다면 음악을 애인 삼은 이었을 것이다. 이 필살기는 첫 번째 테이프의 A면 첫 번째 곡과 다섯 번째 테이프의 B면 여섯 번째 곡에 자리 잡았다.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막중한 역할이었다. 정말이지 유치한 이유였다. 인내심을 갖고 당신을 기다려왔으며, 만약 잘 안 되더라도 당신을 기억하겠다는 소박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목동, 버스정류장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피터 퀼(오른쪽)이 사랑하는 여인 가모라(조 샐다나 분)에게 자신의 녹음테이프를 들려주며 키스하고 있다. [사진 제공 · IMDB]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피터 퀼(오른쪽)이 사랑하는 여인 가모라(조 샐다나 분)에게 자신의 녹음테이프를 들려주며 키스하고 있다. [사진 제공 · IMDB]

운명의 그날이 찾아왔다. 가방 속에는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봐 비닐로 단단히 포장한 카세트테이프 5개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목동행 버스에 탔고, 나도 평소처럼 마지막 승객으로 버스에 올랐다. 무릇 모든 작전의 선행조건은 적진을 탐색하는 것. 그녀의 집 앞에는 파리공원이란 곳이 있었다. 그곳을 결전의 장소로 삼을 요량이었다. 그녀가 파리공원의 분수대를 지날 무렵,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뒤를 바짝 밟았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뒤를 힐끗 돌아봤다. 15년간 발휘한 용기의 총합보다 그때 발현된 용기가 더 컸을 것이다. 

“저, 저기!”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더 커지며 시선이 마주쳤다.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늘 있는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인기녀에게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었겠는가. 지극히 평온했다. 여기서 말을 꺼내고 카세트테이프를 덥석 안겨준 뒤 뒤돌아서야 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가진 용기의 총량이 부족했나 보다. 입이 얼어붙고 몸은 마비됐다. 손은 주머니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말을 걸었다. 

“홍대 가는 버스 어디서 타?” 

젠장, 옆에 있는 분수대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 그녀는 인기녀. 그동안 이런 질문도 숱하게 받았겠지. 손가락으로 무표정하게 저쪽을 가리키며 “저어~기”라고 말한 후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나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쿵쾅거리는 심장만 부여잡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영화에서 흔히 보듯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나를 먼저 불러 긴장감을 풀어준다든가, ‘이대로는 안 되지!’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든가 하는. 그러나 환상이었다. 현실은 원래 냉혹한 법이다. 하지만 열여섯 살 소년이 그런 현실 따위를 알 리 없었다. 

그 후 인내와 추억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는 친구들의 생일선물로 하나씩 사라져갔다. 당연히 동성 친구들이었기에 대부분 “선곡이 너무 남세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머리 좋은 놈은 그 테이프를 역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그들에겐 좋은 머리와 강고한 용기가 있었는지, 100% 성공률을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한 번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주간동아 2018.09.05 1154호 (p76~77)

  •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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