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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공작원 흑금성, 성공한 공작 태영호 사건

정치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것을 그린 영화 ‘공작’

실패한 공작원 흑금성, 성공한 공작 태영호 사건

1990년대 북한 내부 모습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영화 ‘공작’의 한 장면. 황정민은 북한으로 간 스파이 역을 맡아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다. [사진 제공·CJ엔터테인먼트]

1990년대 북한 내부 모습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영화 ‘공작’의 한 장면. 황정민은 북한으로 간 스파이 역을 맡아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다. [사진 제공·CJ엔터테인먼트]

오래전에 영화인들을 만나면 ‘흑금성’을 소재로 한 공작 영화를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하곤 했다. 첨예하던 냉전 시절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의 대공(對共) 투쟁과 삶을 소재로 한 영화 ‘굿 셰퍼드’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공작원들에 대해 냉정한 이 영화는 카스트로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쿠바인들을 훈련시켜 다시 쿠바 남부 피그만으로 침투시킨 사건을 다룬다. 이들 쿠바인 공작요원들이 지도부의 판단 실수와 기밀 누설로 피그만에서 사살되거나 체포되는 비극을 담담히 그렸다. 여기서 리더는 ‘이 일은 선(善)이니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 선이 품고 있는 ‘그림자’를 무시하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했다. 추종자 또한 절대적 충성을 고집해 경고를 외면하는 ‘집단 사고(group think)’를 했다. 중요한 기밀이 아들의 여자친구를 통해 누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주인공이 그 여자친구를 간접 살인하는 대목에서는 전율이 느껴진다.


공작원을 死地로 몰아넣는 국가

1996년 9월 무렵 ‘흑금성’ 박채서 씨(왼쪽)가 북한을 방문, 애틀랜타올림픽 여자유도 48kg급 금메달리스트인 계순희와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제공·KBS]

1996년 9월 무렵 ‘흑금성’ 박채서 씨(왼쪽)가 북한을 방문, 애틀랜타올림픽 여자유도 48kg급 금메달리스트인 계순희와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제공·KBS]

무정(無情)하지만 ‘용정(用情)’한 것이 공작이다. 상대에게는 뇌쇄적인 유혹과 말 못 할 두려움을 뿌리며 포섭을 시도하지만, 자신의 두려움과 이기심은 기계적으로 제거해가면서 ‘오로지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공작이기 때문이다. 임무를 수행하다 맞이하는 것은 ‘기록 없는’ 훈장 아니면, 자살 혹은 타살로 ‘기록되는’ 최후다. CIA 추모의 벽에는 실명을 밝혀서는 안 되는 공작원 125명을 기리는 별이, 국가정보원(국정원) 앞 보국탑에는 46개의 별이 새겨져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흑금성은 실패한 공작원이다. 그 이유는 ‘성공한 공작’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한 공작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의 망명이다. 이 공작은 태 전 공사의 망명을 특종 보도한 기자조차 “(전말을)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다. 일부 영국 언론이 영국 MI6(해외정보국)이 태 전 공사를 항공기에 태워 주독 미군기지로 보냈고, 거기에서 태 전 공사가 한국으로 갔다고 보도했지만, 국정원의 공작은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 태 전 공사 망명 과정에서 국정원 어느 팀이 어떻게 작전을 짜고 누구를 에이전트로 내세워 그와 접촉했느냐는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장성택과 김정남 피살 이후 북한은 ‘김정은 세상’이 된 것 같지만, 아직 김정은이 두려워할 만한 ‘백두혈통’이 남아 있다. 김정은의 삼촌인 김평일 주체코 북한대사다. 북한에 급변이 일어날 때 국정원 등 정보기관은 김평일을 북한에 집어넣는 공작을 시도해볼 수 있다. 이러한 작전을 짤 경우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김평일과 접촉이다. 그런데 김평일은 여간해서는 대사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체코 정부의 국경일 행사 정도에만 조용히 참석하는데, 그 자리에서 김평일을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체코는 물론, 여러 나라의 정보기관이 김평일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평일과 악수하는 사람이 손에 쪽지를 쥐어주는지 등을 용의주도하게 관찰한다. 


1997월 4월 20일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한 황장엽(가운데) 씨가 신병을 인수하기 위해 
나온 이병기 당시 안기부 제2차장(황씨 왼쪽)과 함께 기자회견장으로 향하고 있다(위). 
‘KLO’ 부대장 출신인 고(故) 이연길 선생. [동아DB]

1997월 4월 20일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한 황장엽(가운데) 씨가 신병을 인수하기 위해 나온 이병기 당시 안기부 제2차장(황씨 왼쪽)과 함께 기자회견장으로 향하고 있다(위). ‘KLO’ 부대장 출신인 고(故) 이연길 선생. [동아DB]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포섭과 접선은 그렇게도 이뤄진다.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으면 김평일 활용 공작은 탁상공론이 된다. 이것이 해외공작의 어려움인데, 국정원 공작조는 영국 런던에서 태 전 공사를 가족과 함께 ‘깔끔히’ 데려왔으니, 최고의 공작을 해냈다 해도 과찬이 아니다. 태 전 공사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 1997년 황장엽 조선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꾸민 최고의 공작 가운데 하나였는데, 뜻밖의 일로 공개됐다. 그리고 공작의 정수(精髓)를 보여줬다. 

그때 N씨가 이끈 국정원 공작 조직이 고용한 에이전트는 당시 70세이던 고(故) 이연길 선생이었다. 함남 원산 출신인 이 선생은 6·25전쟁 때는 미군 첩보조직인 KLO 산하 부대를 이끌며 북한에 침투했고, 전후에는 지속적으로 중국을 드나들며 대북사업을 모색하다 북한에서 나온 사업가 김덕홍 씨를 통해 황 전 비서를 만나게 됐다. 이후 2년여에 걸쳐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주제는 한민족 부흥 방안이었다. 뜻이 통한다고 느낀 황 전 비서는 자신이 쓴 글들을 이 선생에게 줬다. 

이 선생은 그 글들을 한 월간지 기자에게 넘겨줬다. 장기간 관찰을 통해 황 전 비서가 망명할 뜻이 있음을 확인한 안기부는 다음 공작에 들어갔다. 주체사상 홍보를 위해 일본에 온 황 전 비서를 일본에서 망명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밀착 경호 탓에 황 전 비서는 숙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 전 비서를 멀리서 따라다니던 이 선생은 ‘황 비서의 배려로 이북에 있는 고향을 방문한 바 있는 재미 사업가 백영중 씨가 30만 달러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조총련 사람을 통해 ‘반(半) 공개적’으로 황 전 비서에게 전달하게 했다.


총풍 사건과 흑금성 사건

그것이 조총련 경호가 없는 중국에서 망명하라는 암시였다.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에 간 황 전 비서는 경호가 소홀해진 틈을 타 북한대사관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한국영사부 건물로 달려가 역사적인 망명을 했다. 그리고 황 전 비서의 문건을 받은 월간지 기자가 차례로 문건을 공개함으로써 이 선생의 공작이 알려졌다. 공작원 세계에는 나이와 성별이 없다. 1992년 뿌리가 발각된 남조선노동당 사건의 주역 이선실(작고)도 75세 할머니 공작원이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Think the unthinkable)’는 공작의 모토다. 

흑금성 박채서 씨는 광고기업을 운영하는 P씨와 알게 됐다. 흑금성은 P씨에게 자신이 대북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북한에서 광고물을 찍고자 했던 P씨를 끌어들였다. 지금처럼 외화에 목말랐던 북한은 P씨가 북한에서 삼성전자 홍보물 등을 찍겠다고 하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흑금성은 사업가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을 만나 두뇌 싸움에 들어갔다. 안기부는 흑금성에게 북한에 줘도 되는 고급 정보를 전하게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에 대한 정보 등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급 정보를 줘야 상대도 고급 정보를 주며 신뢰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연길 선생이 황 전 비서와 만든 우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는 공작원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정치인을 만난 것이다. 

19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했다. 선거 직전 북한군이 판문점에 진지를 구축하는 사건이 있었다. 패배한 야당은 ‘여당이 북한에 의뢰해 북한군이 판문점 위기를 일으켰다’며 북풍 사건을 주장해 나라가 시끄러웠다. 여당과 북한의 공모를 거론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외환위기 하에서 15대 대선을 치러 야당 김대중 후보가 당선했다. 정권교체를 이루자 15대 대선을 앞두고 여당이 북한에게 판문점에서 총격을 일으켜달라고 요청했다는 ‘총풍(銃風) 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의 주인공으로 북한산 어물을 수입하던 장석중 씨와 북한을 거쳐 유럽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겠다던 한성기 씨,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오정은 씨 등이 거론됐다. 총풍 사건은 보수정당이 북한과 내통한 것이기에 온 나라가 어수선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대법원은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해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이렇게 총풍 사건이 막 일어났을 때 함께 터져 나온 것이 안기부 간부 이모 씨의 파일 사건이다. 

15대 대선 직전 안기부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으려고 한 행동은 총풍이 아니라 ‘아말렉 사건’ 등이었다. 이씨는 그 내용이 적힌 파일을 새 정부 관계자에게 전하며 자신의 구명을 꾀했다. 그 파일에는 흑금성이 새 정부 실세인 정동영 의원 등을 만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이 가진 마력 때문에 언론이 폭발적인 관심을 표현하자 박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여당을 돕기 위해 북풍 사건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야당에 알려 무산되게 함으로써,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흑금성을 향하던 ‘칼끝’이 사라졌다. 박씨는 더는 조사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드러났으니 공작원 활동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조르게, 코헨은?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 5월 14일 국회 강연에 앞서 취재진에게 “북한은 핵 폐기를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한다고 본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동아DB]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 5월 14일 국회 강연에 앞서 취재진에게 “북한은 핵 폐기를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한다고 본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동아DB]

한없이 유연해야 하는 것이 공작원이다. 공작원은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애국이 그것이다. 러시아는 리하르트 조르게가 있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이길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엘리 코헨이 있었기에 6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적국에서 처형된 전설적인 공작원이다. 

애국과 헷갈리는 것이 정치에 대한 충성이다. 과거 북한 공작원들은 김일성, 김정일 장군에 대한 맹세를 한 후 활동을 시작했다. 정권을 위한 공작과 국가를 위한 공작을 동일시한 것이다. 반면 국정원 직원들은 태극기에 대한 서약을 한 다음 활동을 한다. 민주국가에서는 정권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나니 헌법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을 위해 공작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다. 

15대 대선 직전 안기부는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고자 아말렉 공작을 했고, 그 직후에는 간부가 자신의 구명을 위해 공작 정보를 들고 정치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정치로부터 가장 멀리 있어야 할 공작원이 15대 대선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다. 흑금성 사건이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흑금성을 다룬 영화 ‘공작’에는 이 대목이 빠졌다. 

지금 국정원은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북한 비핵화를 유도하는 발판을 만들어내는 것과 정치 개입을 끊는 내부 개혁을 해내는 것이다. 화급한 일이 많은 지금 ‘1997년’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주간동아 2018.08.29 1153호 (p44~46)

  •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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