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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포인트 시사 레슨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는 따로 있다

자유연애 사상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대부터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는 따로 있다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유화 ‘티스베’(1909). 이웃집 총각 피라모스가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에 귀 기울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유화 ‘티스베’(1909). 이웃집 총각 피라모스가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에 귀 기울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죽음도 불사한 낭만적 사랑 이야기의 원형 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중세 이탈리아 베로나를 무대로 양대 라이벌 가문인 몬터규가와 캐풀렛가 출신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초기작이다. 정식 출판된 시점은 1597년이지만 1590년대 초에 초판이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오페라, 발레, 뮤지컬, 영화, TV 드라마 등으로 무수히 제작됐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미국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큰 성공을 거둔 1957년 이후 다양한 변종이 생산되면서 낭만적 러브스토리의 원조로 대접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이 근대적 자유연애 사상의 진원지라는 오해를 낳곤 한다.


피라모스와 티스베

영국 화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로미오와 줄리엣’(1870년 무렵). 셰익스피어 희곡의 발코니 장면을 그렸다. [위키피디아]

영국 화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로미오와 줄리엣’(1870년 무렵). 셰익스피어 희곡의 발코니 장면을 그렸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 원작은 따로 있다. 셰익스피어가 직접 참고한 작품은 영국 시인 아서 브룩이 1562년 운문체로 각색·번역한 ‘로메우스와 줄리엣의 비극적 역사’와 영국 작가 윌리엄 페인터가 1567년 다양한 이탈리아 이야기들을 산문체로 번역해 엮은 ‘기쁨의 궁전’이다. 이들 이야기의 원전은 이탈리아 수사이자 작가인 마테오 반델로가 1554년 발표한 ‘줄리에타 에 로메오’다. 하지만 이 작품에 앞서 1531년 발표된 루이지 다 포르토의 동명 작품이야말로 베로나를 무대로 삼고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는 점에서 원조에 가깝다. 몬터규와 캐풀렛이란 가문명, 사랑의 훼방꾼 티볼트, 사랑의 메신저인 로렌스 신부와 줄리엣의 유모도 이 작품에 처음 등장한다. 

그렇다면 ‘줄리에타 에 로메오’가 원조일까. 아니다. 원조는 중세 이탈리아를 훌쩍 뛰어넘어 고대 바빌로니아로 달려간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이야기’에 소개된 ‘피라모스와 티스베’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바빌로니아의 세미라미스(Semiramis) 여왕 시대 한마을 이웃집에 살던 청년 피라모스와 여인 티스베는 사랑에 빠지지만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다. 할 수 없이 두 집 벽 사이에 난 틈으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두 사람은 으슥한 밤 오래된 무덤가 뽕나무 아래서 만나 함께 야반도주하기로 약속한다. 

먼저 도착한 티스베는 약속 장소에 사자가 나타나자 몸을 숨기는데, 얼굴을 감싸던 베일이 날아가 방금 사냥을 마친 사자에 의해 뜯긴다. 얼마 후 도착한 피라모스는 갈기갈기 찢기고 피 묻은 티스베의 베일을 발견하고 그녀가 사자에게 잡아먹혔다는 절망감에 칼로 자결한다. 원래 흰색이던 오디(뽕나무 열매)는 그의 피에 물들어 검붉은 색을 띠게 된다. 다시 약속 장소로 돌아와 이 모습을 본 티스베는 탄식 끝에 피라모스의 칼로 역시 자결한다. 신들은 둘의 사랑을 안타깝게 여겨 오디 색을 검붉은 자주색으로 바꾼다. 

이 이야기는 중세시대 무수히 많은 시인에게 영감을 줬다. 이탈리아 시인 조반니 보카치오와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는 이 이야기를 변형해 자신들의 작품에 녹여냈다. 루이지 다 포르토의 ‘줄리에타 에 로메오’는 이런 전통을 토대로 고대 바빌로니아 이야기를 중세 이탈리아 베로나의 이야기로 바꿨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전통 위에서 유명한 발코니 장면과 시적인 대사를 추가해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다. 따라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대변되는 자유연애 사상은 르네상스 시대 산물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면면히 내려오던 전통에 입각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랑 노래

그 전통의 출발점이 바빌로니아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바빌로니아는 인류문명의 출발지라 부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아시리아-바빌로니아로 이어진 고대제국에 의해 형성됐다. 히브리 성경의 노아설화를 비롯한 무수한 이야기의 젖줄이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시작됐음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이들 문명권의 쐐기문자(설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이 20세기 들어 대거 발굴, 해독된 결과다. 

인류문명의 설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불리는 ‘길가메시’는 기원전 2600년 무렵 수메르 시대를 배경으로 우루크라는 도시국가의 왕이자 전사였던 길가메시의 모험담이다. 사실 길가메시보다 앞선 시대의 왕이던 엔메르카르와 루갈반다를 주인공으로 한 점토판이 파편적으로 발견됐다는 점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길가메시’에도 사랑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바로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영웅 길가메시를 짝사랑하던 풍요의 여신 이슈타르에 대한 내용이다. 

가장 오래된 사랑 노래 역시 수메르 시대의 것이다. 기원전 20세기 무렵 수메르를 통치하던 슈신(또는 슈슈엔)의 시대 그와 결혼한 여인이 쓴 ‘슈신을 위한 사랑 노래’다.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가 지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에 따르면 당시 수메르 왕은 대지 및 가축의 생산력을 풍부하게 하고자 태고의 여신인 이난나의 여사제 가운데 한 명과 매년 신성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간택된 여사제 중 한 명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신랑이여, 내 가슴속의 사랑하는 이여/꿈같이 달콤한 그대의 아름다움이여/사자여, 내 가슴속의 사랑하는 이여/꿈같이 달콤한 그대의 아름다움이여’로 시작한다. 1900년 발굴돼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점토판에 적힌 시에는 ‘나를 침실로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어루만지게 해주세요’ ‘우리 집에서 새벽까지 주무세요’ ‘나를 애무해주세요’ 같은 노골적인 유혹의 내용도 담겨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죽음조차 뛰어넘은 사랑이든, 정략적 선택으로 이뤄진 사랑이든 그것은 인류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존재해왔다.




주간동아 2018.08.22 1152호 (p6~7)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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