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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분노의 시대’를 꿰뚫는 2가지 시선

“근대 서양이 심은 씨앗” vs “고대의 지혜로 돌아가자”

‘분노의 시대’를 꿰뚫는 2가지 시선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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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콤해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연기처럼 커지는 법이지요.” 

고대 그리스 음유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의 말이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신과 인간들 사이에 분노가 사라지기를 원하지만 분노야말로 유혹적이면서 전파력도 강한 감정임을 갈파한다. 

고대인에게 분노는 파멸을 부를 수 있기에 기피해야 할 감정이었다. 그리스인에게 과도한 분노의 표출은 야만인의 징표였으며, 로마인들에게 분노는 통제력이 없어 무력한 아녀자의 감정이었다. 

그런데 21세기는 ‘분노의 시대’로 명명되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자유를 약속했던 세계화·정보화의 장밋빛 비전은 금융위기, 실업, 테러리즘, 반달리즘, 포퓰리즘, 국수주의, 인종주의, 여성혐오라는 잿빛 병균에 감염돼 무력감을 호소할 뿐이다. 

유럽에서 자란 무슬림 젊은이들이 이슬람국가(IS)로 상징되는 이슬라모파시즘에 심취해 인간 말종이나 할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아랍의 봄’으로 권위주의 체제에서 탈피하나 싶던 아랍 국가들은 내전과 독재라는 아마겟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속주의 아랍국의 모델이던 터키는 포퓰리스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장기집권으로 21세기 술탄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넘어오는 난민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동유럽과 남유럽에선 집단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극우파가 득세 중이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였던 영미권에서도 국수주의와 포퓰리즘이 횡행하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트럼프 집권이란 뚜렷한 퇴행 징후를 보이고 있다.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분노의 시대’ 저자인 판카지 미슈라, ‘분노와 용서’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왼쪽부터). [열린책들, 동아DB, 지호영 기자]

이런 현상의 뒤에는 하나같이 분노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기독교문명에 대한 적개심이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이든, 각자도생의 세계를 만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든, 주류가 되지 못한 중하층 노동자들의 몽니든 그 밑바닥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분노의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분노의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까. 이에 대해 독창적 시각을 제시한 책 두 권이 6월 국내에 나란히 번역, 출간됐다. 미국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 시카고대 교수의 ‘분노와 용서’(뿌리와이파리)와 ‘뉴욕타임스’ 북리뷰와 ‘뉴요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판카지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열린책들)다. 

흥미롭게도 이 두 책은 모두 인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분노와 용서’는 누스바움의 2014년 영국 옥스퍼드대 존 로크 강좌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 강연의 계기가 된 사건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2002년 주지사로 재임하던 시절 구자라트주에서 벌어진 힌두교도의 무슬림 학살사건에 대한 글이었다. 

‘분노의 시대’ 저자인 미슈라는 인도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히말라야 산골마을로 들어가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하며 동서양의 접점을 독창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펼쳐왔다. 이번 책에서도 21세기를 비추는 거울로 19세기 말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적 에피소드를 활용하고 있다.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부터 살펴보자. 이 책은 오늘날 분노의 시대가 된 것은 서구 주류 학계가 주장하는 이슬람의 부상에 따른 ‘문명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근대 서유럽에서 씨앗을 뿌리고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게 한 선망의 보편화라는 원죄 때문이라는 점을 18세기 이후 서양 고전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특히 세속적 욕망의 화신이던 볼테르와 그런 계몽주의 기획의 기만성·속물성을 경고한 루소를 대비시킨다. 

18세기 계몽주의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의식, 물질적 풍요에 대한 기대감의 보편적 확산이 이뤄졌다. 하지만 산업자본주의가 작동한 이후 정작 그 수혜가 소수 엘리트에게만 돌아가게 된 현실에 분노한 대다수 민중의 르상티망(원한)을 초래했다. 선망과 질투, 좌절과 분노가 섞인 그 르상티망에 불을 지른 것이 파시즘, 스탈리니즘 같은 전체주의와 양차 세계대전이었다. 18세기 서유럽에서 시작돼 19세기 유럽 전 대륙과 러시아를 강타하며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잉태했고 결국 무차별적 폭력과 파괴를 초래했다. 전후 국력을 확장한 미국이 그 치유와 완충 역할을 맡았으나 탈냉전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똑같은 메커니즘이 다시 작동하면서 서구 사회에 대한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시인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사례를 보자. ‘창조적 파괴’를 앞세워 ‘미래파’ 시인들의 멘토로 불렸지만, 실제의 그는 과대망상에 빠져 야만적 폭력과 여성혐오, 군국주의, 인종차별주의를 선동한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밤마다 제복 입은 병사들 앞에서 도발적 연설을 마친 뒤 섹스에 탐닉하던 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롤모델’이었으며 21세기 포퓰리스트 정치가로 부활하고 있다. 

책에는 그런 사례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2015년 IS의 파리테러를 이슬람 탓으로 돌리지만 1894년 파리 생자르역 카페에서 무차별적 폭탄 테러로 20여 명의 인명피해를 낸 에밀 앙리라는 프랑스 지식인이 있었다. 1995년 오클라호마 미국 연방정부 청사를 폭파한 티머시 맥베이가 1993년 세계무역센터에 최초로 폭탄테러를 시도한 람지 아흐메드 유세프와 감옥에서 만나 인생 절친이 됐다는 역설도 빼놓을 수 없다. 

맥베이는 이라크전쟁 참전용사 출신의 백인 기독교도였고, 유세프는 결국 2001년 9·11테러 때 여객기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을 무너뜨리는 알카에다의 무슬림 조직원이었다. 국적과 종교, 사상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의 공통점은 비주류로 밀려났다는 굴욕감과 무력감에 빠져 극단적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앙갚음에 나서려 했다는 점이었다.


“분노와 용서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다”

이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 선우(이병헌 분)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쳐내려 한 조직의 보스 강사장(김영철 분)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에 딱 부합한다. 계몽주의 이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자아(에고)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 상황에 대한 모멸감이 오늘날 세계가 겪고 있는 자기파멸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는 이런 분노의 본질적 문제점을 파고든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분노와 그 대안처럼 설명되는 용서가 모두 암묵적으로 상대의 굴복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영혼의 오염’을 가져온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고전적 분노는 세 갈래로 대별된다. 하나는 누군가를 무시함으로써 그의 지위격하를 초래한 것에 대한 분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지위격하에 대한 분노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분노가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피해에 대한 앙갚음을 요구하는 인과응보의 분노다. 분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노다. 

이 두 갈래의 분노는 모두 상대방에게 굴욕을 안기길 원하는 원한과 복수가 깔려 있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며, ‘엎지른 물’을 다시 담으려 하는 과거지향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 

마지막으로 누스바움이 ‘이행분노(Transition-Anger)’라고 부르는 미래지향적 분노가 있다. 규범적 불합리성을 보고 “말도 안 돼,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공분을 느끼면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이성적 단계로 이행하게 하는 분노다. 

누스바움은 이런 세 갈래의 분노를 다시 친밀한 영역(가족과 연인, 친구), 중간 영역(직장과 일상), 정치적 영역(공공과 복리)으로 나눠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그에 따르면 친밀한 영역에선 분노가 아니라 슬픔으로 충분하며, 중간 영역에서도 분노보다 아량이나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직 정치적 영역에서만 분노가 일정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이행분노’에 한한다.


간디보다 만델라

20세기 3대 비분노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서 킹 목사, 넬슨 만델라(왼쪽부터). [동아DB]

20세기 3대 비분노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서 킹 목사, 넬슨 만델라(왼쪽부터). [동아DB]

누스바움은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자비의 여신(에우메니데스)’에서 표출된 고대의 지혜를 따를 것을 권한다. 아비(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어미(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 오레스테스는 친족을 살해할 경우 반드시 응징을 가하는 복수의 여신들(퓨리)에게 쫓기다 아테네로 피신한다. 거기서 아테네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은 원초적이고 강박적인 퓨리를 설득해 아테네의 민주정과 법치주의를 수용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을 자애와 사랑으로 돌보는 에우메니데스로 변신시킨다. 

아이스킬로스는 이를 통해 문명은 강박적이며 피에 굶주린 분노를 울타리에 가둬놓은 것을 넘어서 침착하고 사려 깊은 인간적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또 진정한 정의란 과거에 대한 복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행복과 번영을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함을 꿰뚫는다. 

누스바움의 통찰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에우메니데스의 핵심적 요소라 여겨지는 용서 역시 세 갈래가 있음을 냉철히 분석한다. 고백·사죄·용서로 구성되는 교환적 용서, 가해자의 회개를 강요하지 않는 무조건적 용서,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무조건적 사랑과 아량이다. 이 중 교환적 용서는 타자의 굴욕을 전제로, 그런 피해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나라는 자기애가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퓨리의 체취가 느껴진다는 것이 누스바움의 날카로운 통찰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 위기 상황 때마다 단체로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비는 행태가 불쾌하게 다가서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의 굴욕적 자세를 접하는 순간 우월감을 맛보리라는 생각 자체에 자신과 타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바라보는 야수성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지금은 고개를 숙이지만 언젠가는 네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겠다’는 속내가 읽히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분노와 용서에 대한 이런 날카로운 잣대로 흔히 20세기 3대 비폭력 지도자로 알려진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서 킹, 넬슨 만델라를 새롭게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 지도자는 비폭력이 아니라 비분노의 지도자다. 다만 간디는 부친이 돌아가시는 순간 아내와 사랑을 나눴다는 죄책감 때문에 반평생 아내와 잠자리를 거부했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분노 표출이라는 한계를 보였다. 7월 18일 탄생 100주년을 맞는 만델라는 비분노가 반드시 비폭력만은 아님을 입증했으며 평생 용서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으면서도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상대마저 무장해제시켰다는 점에서 아량과 사랑의 화신이란 평가를 받았다.




주간동아 2018.07.11 1146호 (p66~68)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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