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1

2018.06.06

한창호의 시네+아트

‘벌거벗은 어린이’의 삶을 응원하며

토드 헤인즈 감독의 ‘원더스트럭’

  • 입력2018-06-05 13: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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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CGV아트하우스]

    [사진 제공 · CGV아트하우스]

    박물관에 가면 ‘경이로운 신비’를 보고 놀라곤 한다. 이를테면 자연사박물관에 보관된 것들, 곧 수천 년 전 지구에 떨어진 유성의 조각, 박제된 거대한 나비들, 뼛조각들로 재현된 공룡의 모습에 넋을 잃는다.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존재와 마주 섰을 때 느끼는, 시공을 초월한 우연의 신비 같은 것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원더스트럭’은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경이에 사로잡힌(Wonderstruck)’ 느낌을 모티프로 삼았다. 시대가 다른 두 이야기가 교차된다. 먼저 1927년 억압적인 아버지의 일방적 교육에 지친 청각장애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먼즈 분 · 실제 청각장애인)는 가출해 엄마를 찾으려고 혼자 뉴욕으로 향한다. 하지만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가 된 엄마는 딸의 방문을 귀찮아한다. 이때 화면은 당시 영화처럼 모두 흑백이다. 

    50년 뒤인 1977년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 분)은 번개를 맞고 청각장애인이 된다. 이모 집에 얹혀사는데, 그동안 비밀에 부쳐져 있던 친아버지의 존재를 찾아 역시 뉴욕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화면은 팝아트 그림처럼 강렬한 컬러를 뿜어낸다. 

    시대를 달리하는 청각장애 소녀와 소년이 대도시 뉴욕에 자리한 자연사박물관에서 시각적 경이로움에 휩싸이는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다. 

    헤인즈 감독은 멜로드라마의 장인이다. 시대 흐름에 역류하는 사람들, 또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관계를 그리면서 공동체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을 잘 이끌어낸다. 1950년대 여성동성애자의 관계를 그린 ‘캐롤’(2015)이 대표적이다. 

    ‘원더스트럭’에서 주목하는 대상은 어린이다. 게다가 두 어린이는 모두 가족의 울타리에서 밀려나고, 장애도 갖고 있다. 이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 시대 어린이의 상징일 것이다. 제대로 자라기도 전 길바닥에 홀로 내팽개쳐진 것처럼 벌거벗은 삶을 살고 있어서다. 이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엄마와 아빠를 찾아 길을 떠나는 모티프는 결핍을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간절한 희망일 테다. 



    자, 이제 50년 시차를 둔 두 어린이의 관계만 남은 셈이다. 그 관계를 연결 짓는 곳이 뉴욕 자연사박물관이다. ‘원더스트럭’에 따르면 그곳은 ‘경이의 공간’이다. 도무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수많은 존재가 한곳에 모여 있어서다. 

    두 어린이가 각자의 시대에서 박물관 이곳저곳을 놀라운 마음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가장 오래 찍혔다. 마치 박물관이 두 어린이의 취미 수집 스크랩처럼 묘사돼 있다. 어릴 적 스크랩북을 크게 펼치면 박물관이 되는 식이다. 

    박물관은 이제 뉴욕 전체로, 또 뉴욕은 결국 ‘경이의 연속’인 우리 삶의 은유로 확대된다. 아무 관계없어 보이던 소녀와 소년은 이곳 박물관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경이’가 된다. 말하자면 결핍의 고독이 연결됨으로써 결국 하나의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연결의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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