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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트 댈 바에 홈런 쳐라

저렴해진 희생번트의 가치, 그만큼 커진 선수의 권한

번트 댈 바에 홈런 쳐라

한용덕 한화 이글스 감독. [동아DB]

한용덕 한화 이글스 감독. [동아DB]


“내가 현역 (투수)일 때 상대팀이 번트를 하면 ‘땡큐’였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쉽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할 때가 아니면 가능한 한 번트 사인을 내지 않으려 한다.” 

올해부터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지휘봉을 잡은 한용덕(53) 감독이 한 말입니다. 혹시 모르는 분이 있을까 싶어 말씀드리자면 한 감독은 ‘배팅볼 투수’로 시작했으나 결국 1군 무대에서 통산 120승(118패 24세이브)을 기록하고 은퇴한 명투수 출신입니다. 

올 시즌 한화는 5월 7일까지 34경기를 치르는 동안 희생번트를 딱 4개만 기록했습니다. 만약 이 페이스로 남은 일정을 모두 소화한다면 한화는 팀 희생번트 17개로 올해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1년 동안 희생번트가 이렇게 적었던 팀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넥센 히어로즈가 지난해 기록한 21개가 팀 희생번트 최저 기록입니다. 한화가 지난해 희생번트 1위(85개) 팀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극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변화입니다. 

넥센만 희생번트가 적었던 게 아닙니다. 지난 시즌 전체 720경기에서 나온 총 희생번트는 딱 600개였습니다. 600개라는 숫자 자체는 프로야구 원년(1982)부터 따지면 13번째로 적은 것이라 그리 특이해 보이지 않습니다. 단, 1년에 720경기를 치른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프로 원년에는 전체 경기가 현재 3분의 1인 240경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기당 희생번트 수를 계산해보면 지난해 기록은 0.83개로 역대 최저였습니다. 

이제는 이마저도 많아 보입니다. 5월 7일 현재 총 177경기를 치르면서 10개 구단이 기록한 희생번트 수는 118개로 경기당 평균 0.67개밖에 안 됩니다(그래프 참조). 지난해와 비교해도 80% 수준으로 또 줄어든 겁니다. 현 추세를 유지한다면 올 시즌 전체 희생번트 수는 480개가 됩니다. 리그 희생번트가 500개 미만이던 때는 6개 팀이 총 330경기밖에 치르지 않은 1985년(471개)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렇게 희생번트가 줄어드는 게 긍정적이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예”입니다. 이건 제가 세이버메트리션(야구통계학 애호가)인 동시에 민주주의자라 그렇습니다.


희생번트 감소는 ‘야구 민주화’와 맞닿아 있다?

번트 댈 바에 홈런 쳐라
희생번트가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점수 인플레’ 때문입니다. 희생번트는 기본적으로 1점을 뽑는 게 목적입니다. 이 ‘1점의 가치’는 시대마다 다릅니다. 10년 전인 2008년에는 한 팀이 평균 4.5점을 냈습니다. 그러면 1점은 전체 득점의 22.2%를 차지합니다. 올 시즌에는 현재 경기당 평균 5.3점이 납니다. 그 결과 1점의 비중은 18.9%로 줄었습니다. 1점의 가치가 15% 낮아진 겁니다. 여전히 야구는 상대 팀보다 1점이라도 더 얻으면 이기는 경기지만, 이제 1점에 집착해서는 상대팀에게 1점 앞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취점 가치가 떨어진 게 이를 입증합니다. 희생번트가 목표로 삼는 1점은 특히 선취점일 때가 많습니다. 2008년 선취점을 얻은 팀의 승률은 0.690이었습니다. 올 시즌에는 현재 0.627입니다. 어차피 승률 6할이 넘어가는데 0.063 차이가 대수냐고요? 지난해 3위 롯데 자이언츠(승률 0.563)가 이만큼 승률을 더했다면 두산 베어스(승률 0.608)를 꺾고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리그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1승 가치도 줄었습니다. 2008년에는 각 팀이 한 시즌에 126경기를 치렀습니다. 한 경기 비중이 약 0.8%였습니다. 144경기를 치르는 올 시즌은 0.7%입니다. 숫자 자체가 워낙 작아 별거 아닌 듯하지만 비율로 따지면 한 경기의 중요성이 12.5% 떨어진 겁니다. 

이렇게 1점이 경기에서 갖는 희소성이 줄어들고, 한 경기의 승패가 시즌 성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떨어지면 감독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가 덜 요긴하게 됩니다. 감독이 통찰을 발휘해 점수를 ‘짜내는 데’ 성공했다 해도 그게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 대신 선수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감독이라면 누구나 (1점을 짜내는 데 필요한) 희생번트 사인을 낼 수 있어도 (대량 득점에 필요한) 홈런 사인을 낼 수는 없습니다. 한 감독은 희생번트 사인을 잘 내지 않는 데 대해 “감독이 경기에 많이 개입해 잘되는 것을 많이 못 봤다. 결국 경기는 선수가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희생번트 1위 한화와 (공동) 2위 LG 트윈스(76개) 모두 감독이 바뀐 게 우연이 아닐지 모릅니다. 희생번트를 선호하는 감독이 사라져 희생번트가 줄어든 게 아니라 희생번트를 선호하는 감독이 발붙일 곳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는 팀 내 최고 엘리트(감독)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다리고만 있는 게 아니라, 선수가 직접 방향을 찾아가도록 바뀐다는 점에서 ‘야구 민주화’라 불러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선(善)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희생’은 참 고귀한 낱말이지만 희생번트 때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스스로 ‘희생’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희생하라’는 지시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못 치면 못 칠수록 이런 지시를 받기 쉽습니다. 요컨대 희생번트는 팀에서 제일 힘 센 감독의 판단(‘너는 여기서 희생번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거야’)에 따라 힘이 제일 약한 타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입니다. 

아니, 감독이 그렇게 결정한 순간 단타 하나면 사이클링 히트를 완성할 수 있는 타자도 일단 그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실제로 김재박(64) 전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를 이끌던 2003년 8월 15일 이런 상황에 있던 박종호(45·LG 트윈스 코치)에게 희생번트 사인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생번트 사인은 때로는 비도덕적이기까지 합니다. 

스포츠 세계에서 ‘경험’이 ‘성장’으로 가는 밑거름이라는 건 두 번 강조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기회 때마다 희생번트만 대는 선수는 이런 상황에서 공을 치며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잃게 됩니다. 그 결과 이 힘없는 타자가 얻는 것이라곤 희생번트 하나당 타수 하나를 줄일 수 있어 타율 계산(안타÷타수) 때 조금 유리하다는 점뿐입니다. 

야구에 ‘홈런 사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시타 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인이 있다 해도 사인이 나올 때마다 이를 따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팀에서 제일 약한 타자도 때로는 적시타를 치고 홈런도 날리는 게 야구입니다. 야구에서는 또 400타수를 기준으로 타율이 0.240인 타자도 일주일에 한 개씩만 ‘바가지 안타’가 터지면 3할 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희생번트 사인은 이런 가능성을 거의 모두 앗아갑니다. 

맞습니다. 야구에는 분명 희생번트가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아마 타석에 들어선 타자도, 경기를 지켜보는 팬도 ‘아, 지금은 희생번트다’ 하고 알아차릴 겁니다. 그렇게 ‘컨센서스’를 구축해가는 것도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감독 혼자만 아는 자기의 머릿속이 아닌, 우리 모두의 눈앞에 야구가 펼쳐지는 길이니까요.




주간동아 2018.05.16 1138호 (p60~61)

  •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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