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6

2018.05.02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던 인디는 어디로 갔을까

‘홍대 앞’을 고유명사로 만든 하위문화의 실종

  • 입력2018-04-30 17: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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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 앞 거리에서 열린 파티스트릿의 버스킹 공연(왼쪽).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0 참가자들이 인디밴드의 공연을 즐기고 있다. [동아DB, 뉴시스]

    홍대 앞 거리에서 열린 파티스트릿의 버스킹 공연(왼쪽).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0 참가자들이 인디밴드의 공연을 즐기고 있다. [동아DB, 뉴시스]

    여전히 홍대 앞을 ‘젊음의 거리’라 칭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뭔가 ‘핫’하고 ‘힙’한 곳을 찾아다니는 이들은 서울 연남동과 망원동으로 발걸음을 돌린 지 오래다. 그런데 요즘 뜨는 동네와 한창 뜨던 시절의 홍대 앞을 비교해보면 결정적 차이가 있다. 문화의 생산이다. 대안 문화, 혹은 반문화(counter culture) 말이다.
     
    연남동이나 경리단길을 유명하게 만든 곳들은 이른바 ‘맛집’이다. 좁고 허름한 골목을 중심으로 어느 날 생겨난 맛집이 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타고 미식가를 불러 모으면서 죽어 있던 동네를 살리는 게 최근 흐름이다. 인테리어가 독특하고 커피까지 맛있는 카페가 근처에 생기면 금상첨화다. 요컨대 먹고 마시는 문화, 즉 소비를 통한 취향 충족 이상의 것이 없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홍대 앞으로 돌아가보자. 신촌 변방처럼 여겨지던 홍대 앞에는 그 즈음 새로운 공간들이 생겨난다. 펑크, 레게 등 특정 장르를 전문으로 트는 음악 술집이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서울 유명 음악 술집의 시곗바늘이 1970년대에 멈춰 있던 1990년대, 동시대 음악에 맞춰 놀기를 원하는 20대 젊은이들이 홍대 앞에 몰려든 게 그때였다. 새로운 소비자의 출현, 여기까지는 트렌드였다. 그리고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더그라운드의 주류이던 헤비메탈과 블루스가 아닌, 펑크와 얼터너티브를 연주하는 밴드들이 나타났다. 염색한 머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구제 바지에 체인을 매달고 다니던 그들의 연주 실력은 별로였다. 하지만 확고한 태도가 있었다. 기성세대와 주류 음악, 심지어 헤비메탈을 중심으로 한 기존 언더그라운드에까지 날카롭게 각을 세우던 태도 말이다. 음악뿐 아니었다. 충무로의 도제식 시스템을 거부하는 영화 지망생들이 독립영화를, 화단의 폐쇄성에 반기를 든 작가들이 독립미술을 일궈냈다. 그들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서로 얽히며 공연과 전시가 결합된 이벤트를 만들어냈고, 제로(0)에 가까운 자본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홍대 앞 문화는 그렇게 생겨났다. 

    세상은 그들을 인디라 불렀다. 소비자와 생산자 간 벽이 얇았기에 어제의 관객이 오늘의 밴드, 작가, 감독이 되곤 했다. 기존 질서, 문화 대신 새로운 것을 스스로 생산하고자 하는 욕망의 총화였다. 이는 1960년대부터 새로운 청년문화가 싹 트는 공간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서울 명동과 대학로, 이태원과 신촌에 모두 적용된다. 21세기 신규 ‘핫 플레이스’가 놓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금 홍대 앞은 라이브 클럽에 서는 음악인보다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이가 더 많다. 자기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기존 곡을 카피한다. 기타라도 치면 다행인데, 노래방 반주에 맞춰 뻔한 인기 가요를 부른다. 아이돌 음악을 틀어놓은 채 어설프게 안무를 재현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대부분 소음 수준에 그친다. 왜 노래방이 아니라 여기서 저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라이브 클럽이란 걸 경험해보지 못한 행인들은 그게 이 ‘젊음의 거리’만의 특색이라 여기고 잠시 구경한 후 술집과 카페로 사라진다. 



    홍대 앞이라는 지명을 고유명사로 만들던 하위문화가 실종됐다. 이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던 ‘무브먼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 이것은 서서히 진행되는 몰락일까,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한 숨 고르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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