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29

2018.03.14

김범석의 쫄깃한 일본

사토 과장이 대낮에 노래방 가는 이유

학교 · 일터 아닌 ‘제3의 공간’으로 향하는 일본인들

  • 입력2018-03-13 11: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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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북 앤드 베드]

    [사진 제공 · 북 앤드 베드]

    일본 도쿄 도시마구(豊島区) 이케부쿠로(池袋)역. 화려한 조명과 현란한 간판이 즐비한 도쿄 내 대표 역세권 가운데 한 곳이다. 여기에 최근 조용한 책방이 하나 들어섰다. 

    3월 5일 오후 8시. 기자가 책방에 들어서자 감미로운 재즈 음악이 반겼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10여 명이 각자 자리에 앉아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노트북컴퓨터와 태블릿PC를 번갈아 보며 일하는 직장인, 두꺼운 책을 쌓아놓고 공부하는 학생 등 대부분 혼자 온 사람이었다. 

    한쪽에는 캡슐호텔에서나 볼 법한 침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누워 책을 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맞은편에는 샤워 공간도 마련돼 있었다. 책을 보다 숙박도 할 수 있는 것이 이 책방의 가장 큰 특징이다. 준비된 침대만 52개다. 숙박료는 평일 기준3500엔(약 3만5900원)부터. 이곳에서 만난 한 30대 직장인은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가끔 들른다”며 “자료 정리나 회의 준비도 이곳에서 더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운영업체는 개업 2년 반 만에 지점 3곳을 추가로 열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일과 취미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이런 류의 책방을 ‘제3의 공간(서드 플레이스)’이라 부른다.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주장한 제3의 공간은 집(퍼스트 플레이스)도, 직장(세컨드 플레이스)도 아닌 자신만의 정신적 공간을 일컫는 말이다. 휴식은 물론이고 공부, 업무 등 학교나 회사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자기계발을 하려는 사람이 주로 찾는다. 과거 카페나 PC방 등에 나타났던 제3의 공간이 최근에는 역 근처 또는 번화가 부근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다.

    ‘원격근무’ 확산이 낳은 진풍경

    [빅 에코 인터넷 홈페이지]

    [빅 에코 인터넷 홈페이지]

    도쿄의 전철 운영업체 가운데 한 곳인 ‘도큐덴테츠(東急電鉄)’는 요코하마(横浜), 지유가오카(自由ヶ丘) 등 주요 역 앞에 개인 사무실 겸 자기계발 공간을 만들어 빌려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무선 인터넷, 복사기 등이 완비된 이곳은 한 달에 5000엔(약 5만1000원)을 내면 8시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직영점(11곳), 제휴점(43곳) 등 점포만 50곳이 넘는다. 



    노래방도 제3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일본 가라오케 업체 ‘빅 에코’는 손님이 없는 낮 시간에는 빈방을 무선 인터넷과 고선명 멀티미디어 인터페이스(HDMI) 케이블 등이 설치된 개인 공간으로 만들어 시간당 600엔(약 6100원)을 받는다. 일본 화상회의 시스템 업체 ‘브이큐브’도 전화박스 형태의 제3의 공간을 운영하는 등 폐쇄형 공간 역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대규모 복합쇼핑몰이나 위락시설에도 제3의 공간이 필수적으로 입주하는 분위기다. 지상 35층, 지하 4층 규모로 이달 말 오픈을 앞두고 있는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가 대표적이다. 카페와 편의점, 스카이라운지 등이 들어서는 건물 9층에 컴퓨터를 갖고 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제3의 공간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원격근무(텔레워크)를 할 수 있는 등 최근 일본 사회에 나타난 업무 방식의 변화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일하는 방식 개혁’을 내세운 일본 정부의 계획과도 다르지 않다. 일본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정보기술(IT) 등을 활용하고 집에서 일하는 등 근무 형태가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는 통근시간 시내 혼잡도를 낮추는 등 다양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분석해 현재 13%대인 원격근무 비율을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 전까지 3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낮 출근’이나 ‘오후 퇴근’ 등 유연근무제의 확산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운영하는 ‘세븐앤드아이홀딩스’는 이달부터 전체 사원의 30%인 약 1만 명을 대상으로 출근시간을 오전 8시, 9시, 10시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는 유연근무제를 시작했다. 근무시간은 똑같지만 출퇴근 시간을 앞당겨 개인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일본 사단법인 ‘오피스 도넛 토크’의 다나카 도시히데(田中俊英) 대표는 “야근 등 초과 근무만 없다면 제3의 공간이 일본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업무량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일본 정부에서 추진 중인 월말 금요일 조기 퇴근(오후 3시쯤) 제도, 이른바 ‘프리미엄 프라이데이’가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제도 도입 1년을 맞아 최근 일본 직장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실제로 일찍 퇴근하는 직장인은 10명 중 1명(11.2%)에 그쳤다. 

    월말 결산 등 업무가 산적해 있고 일손 부족 현상도 쉽게 개선되지 않는 분위기다. 이는 제3의 공간이 ‘제2의 직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원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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