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2

2017.11.08

황승경의 on the stage

각기 다른 사랑이 전하는 오묘한 떨림

연극 | ‘라빠르트망’

  • 입력2017-11-07 15:45:54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진제공 · LG아트센터]

    [사진제공 · LG아트센터]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199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미녀 배우 모니카 벨루치와 행사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여신’ 자체였다. 비너스 같은 몸매와 매혹적인 미모, 여기에 그녀만의 신비로운 ‘표정 언어’는 유독 특별했다. 1996년 개봉한 영화 ‘라빠르망’에는 그녀의 여신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나리오에선 그녀가 맡은 ‘리사’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지만 영화에서는 관객의 뇌리에 뚜렷이 각인된다. 영화가 개봉한 지 21년이 지난 2017년, 스크린 속 이야기는 무대 위에 색다른 연극으로 올려졌다.  

    막스(오지호 분)는 리자(김주원 분)에게 한눈에 반하고 둘은 뜨겁게 사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리자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막스는 황량하고 허무한 이별의 아픔을 감내하고 뮤리엘(장소연 분)이라는 연인과 앞날을 설계하며 새로운 직업을 찾아 안정을 되찾는다.  

    그런데 우연히 리자와 마주치면서 막스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만사 제쳐놓고 그녀의 아파트를 수소문해 찾아간다. 리자의 아파트에는 남몰래 막스를 짝사랑하던 그녀의 친구 알리스(김소진 분)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에서 리자는 농간을 벌이는 친구를 믿은 죄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다. 

    이 연극은 오지호의 첫 연극무대 데뷔작이다. 연극배우가 직업인 주인공 리자 역을 맡은 발레리나 김주원은 ‘역대급’ 비주얼은 물론, 사뿐사뿐 우아한 8자 걸음으로 종횡무진 무대를 활보한다. 그러나 무대 위 그녀의 구두 소리와 핀 마이크로 확장되는 가쁜 호흡소리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해 아쉽게도 ‘연기하는 발레리나’로 보였다. 반면 꿋꿋한 오지호와 신들린 김소진의 열연은 돋보였다. 

    9개의 가로등, 4개의 천장 스크린 사이에서 나타나는 감각적인 조명과 영상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무대는 수평으로, 수직으로 움직인다. 이에 배우들의 거리는 직선과 곡선, 일직선을 이루며 대칭되고 조절된다. 관객에게는 극중 상황에서 나타나는 감정의 밀도가 시각적으로 전달된다.  



    연출자 고선웅은 극에 달한 내면의 시간은 느리게 느껴진다는 점을 차용해 극의 물리적인 시간을 넘나들며 내면을 표출했다. 그렇게 방어할 새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사랑의 순간 마력을 연극 ‘라빠르트망’은 현대적인 ‘미장센’(mise en scene · 연출가가 무대 위에 모든 시각적 요소를 배열하는 기법)으로 풀었다. 정서가 따사로운 고선웅의 스타일은 연극에 그대로 녹아 있지만, 상투적이고 모호한 각색은 어수선한 느낌도 든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지 오래여도 우리는 누구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기억한다. 무대 위 각기 다른 사랑의 색채와 오묘한 시각적 떨림은 관객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