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5

2017.09.13

구가인의 구구절절

“아, 소리 언니도 힘들었구나”

문소리 감독의 ‘여배우는 오늘도’

  • 채널A 문화과학부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17-09-12 11: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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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문소리에게는 ‘연기파’ ‘대표 여배우’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1999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에서 첫사랑 순임 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오아시스’(2002)의 뇌성마비 장애인, ‘바람난 가족’(2003)의 외도하는 유부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의 핸드볼 선수 등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주연에서 조연으로 비중이 줄어든 게 사실이다. 그사이 문소리는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사족을 붙이면, 그와 시작이 비슷했던 또래 연기파 남성 배우들은 나이가 들수록 승승장구하고 있다. 

    9월 14일 개봉하는 ‘여배우는 오늘도’는 배우 문소리가 주연은 물론, 연출과 각본까지 맡은 작품이다. 극중 배우인 주인공 이름이 ‘문소리’인 데다 그의 남편을 실제 문소리의 남편인 장준환 감독이 연기했다. 다른 감독의 실명도 고스란히 등장해 마치 배우 문소리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일기 속 문소리는 고고한 스타라기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아는 언니’ 같다. ‘미모를 겸비한 재원’으로 한때 꽤 잘나갔지만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 요즘엔 일도, 가정도, 자아도 고민인 어떤 언니들 말이다.




    단편 3편을 엮어 만든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많이 웃었던 건 1막. 영화 캐스팅에서 ‘젊고 예쁜 애’에게 밀린 문소리는 지인들과 산행하던 중 우연히 제작자를 만난다. 최근 꽤 돈을 번, 잘나가는 제작자는 그에게 ‘대학생 자녀를 둔 정육점 여자’ 역을 제안하고 문소리는 슬쩍 마음이 상한다. 제작자와 만남은 산행 후 술자리로 이어지는데, 일행인 남성들이 문소리를 앞에 두고 “얼굴을 하나도 안 고치지 않았느냐”며 “21세기에 자기관리를 안 한다”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술에 취해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가 돼라”고 충고하는 친구에게 문소리는 “네가 더 짜증 난다”며 폭발한다.



    1막이 나이 든 여배우가 겪는 애환을 다뤘다면 2막은 워킹맘이자 생활인으로서 이야기를, 3막은 예술가로서 고민을 담았다. 영화에서 문소리는 선글라스를 낀 채 마이너스 신용대출 3000만 원을 받으려고 은행을 찾는가 하면, 친정어머니의 임플란트 시술 비용을 50% 할인받고자 치과 홍보용 사진을 찍는다. 유명 감독의 특별출연 부탁을 기분 나쁘지 않게 고사하려고 2차 노래방 술자리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열창하고, 동료 무명 감독의 장례식장에선 추레해진 과거 ‘썸남’과 만나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웃픈’(웃기지만 슬픈) 에피소드에 킥킥거리다 보면 스크린 너머 민낯을 한 인간 문소리가 보인다. 욕심 많은 문소리는 아이를 낳고 대학원에서 영화 연출을 배우면서 이 단편들을 찍었다. 그럼에도 그가 본격적인 감독의 길로 나설 것 같진 않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감독은 아무나 하나. 연기나 열심히 하자” 같은 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죄다 조폭 아니면 형사인” 요즘 영화판에서 감독 문소리가 만든 살아 있는 여성 캐릭터는 꽤 반갑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외도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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