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9

2017.08.02

인터뷰 | 개도국에 ‘의료 시스템’ 보급하는 英 의사 피터 스미스

“5년간의 봉사,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간”

‘의무기록지’를 ‘화장실 휴지’로 쓰던 우간다서 보건환경 개선

  • 김건희 객원기자 kkh4792@daum.net

    입력2017-07-31 17: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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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요크(York)에서 30년 넘게 의사로 일하던 피터 스미스(66·사진) 씨는 2012년 한 비정부기구(NGO)의 권유를 받아 아프리카로 떠났다. 보건환경이 열악한 우간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간다에서는 의무기록 데이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수기(手記)로 작성한 환자 의료기록지를 화장실용 휴지로 쓰고 있었다. 컴퓨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부지역 음발레(Mbale) 오지마을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우간다를 방문했을 때 오늘날의 ‘전산’ 의무기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어요.”



    질병 발생시 역학통계도 내

    우간다에서 경험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과거 의무기록이 있어야 정확한 처방이 가능한데, 이것이 없다 보니 눈에 보이는 증상만 치료하는 수준이었다.

    귀국 후 그는 2014년 의료자선단체 ‘EMR4DW(Electronic Medical Records For the Developing World)’를 설립하고, 컴퓨터를 처음 다루는 사람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단순한 EMR(Electronic Medical Records·전자의무기록) 시스템을 개발했다. EMR 시스템은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컴퓨터에 환자 의무기록을 입력하는 것을 말한다.



    스미스 씨는 아프리카의 열악한 보건환경을 미국과 영국 등에 알리면서 기금을 모았고 우간다, 케냐,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도미니카공화국 등 개도국 10개국 진료소 각 1곳에 EMR 시스템을 무료 배포했다. 이들 진료소도 미국과 영국 NGO들이 지원하는 곳이다. 틈틈이 현지 진료소를 찾아 시스템 사용법을 알렸고, 현지 의료진에게는 데이터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들 의료진은 환자 개인별 의무기록을 한눈에 조회하고 있고, 말라리아 같은 질병이 발병했을 때 역학통계도 낼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진료·투약기록이 사라져 발생하는 의료사고도 대폭 줄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여러 개도국에서 ‘EMR 시스템을 도입하고 싶다’는 요청도 쏟아지고 있다. 11월에는 콩고공화국 진료소에, 내년엔 잠비아 진료소에 배포할 예정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26일 스미스 씨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종합관 강의실에서 강의를 했다. ‘연세 글로벌헬스 리더십 코스’ 네 번째 세션 연사로 참가한 것. 한국, 몽골, 베트남 의대생 및 간호대생 30명이 참가하는 프로그램으로, NGO인 유나이티드 보드(United Board)와 세브란스병원의 후원으로 매년 두 차례 연수를 연다.

    3시간 강연을 마친 그와 강의실에서 마주 앉아 오늘 강의를 하게 된 사연부터 물었다.

    “과거처럼 병원에서 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의사라는 직업을 은퇴하지는 않았어요.(웃음) 2012년 미국 NGO 담당자로부터 개도국의 열악한 보건의료 환경을 전해 듣고 우간다로 떠나면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는데, 그 덕에 오늘 한국 워크숍에 참석하게 됐죠.”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는데 왜 오지를 찾아가느냐”는 우문(愚問)에는 “지난 30여 년간 쌓은 의술을 세상에 베풀고 싶었다”고 대답하며 빙그레 웃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잔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세상의 평안을 누리는 듯’ 평온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내가 받은 것, 베풀고 싶었다”

    “열한 살 때 친척분이 성탄절 선물로 조립식 인체모형을 줬어요. 그분도 의사였는데 내가 1시간 만에 인체모형을 조립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도와줬죠. 그를 보면서 의사가 되면 남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들수록 의술이야말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세계 공용어’란 확신이 들더군요. 우간다 진료소 방문을 계기로 잠시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다짐을 실천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개도국에 EMR 시스템을 배포해 열악한 보건환경을 개선하고 기대수명을 높이고 싶어요.”

    그가 말한 우간다 사례처럼 빈곤과 보건환경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전 세계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130만 명 가운데 94%가 개도국에서 발생하고,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난 120만 명 대부분이 개도국 주민이다. 개도국 주민의 거주지 바닥은 대부분 흙으로 돼 있어 질병 감염 위험이 크다. 부엌에 쪼그려 앉아 불을 피우며 음식을 만드는 조리 문화는 화상(火傷)의 주원인이 되고, 집 안이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차면서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 스미스 씨는 “전 세계 사망률 지도와 개도국 지도를 겹쳐보면 두 지역이 교묘하게 맞물린다”고 말한다.

    “에이즈(후천면역결핍증)나 결핵 같은 특정 질병은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 많은 ‘펀딩 자금’이 유입됩니다. 그러니 의료계도 이런 질병 연구에 집중하죠. 반면 설사 같은 일반적인 질병에는 관심이 낮아 연구 실적도 많지 않아요. 개도국 영·유아 사망의 주요 원인인데 말이죠.”

    그가 설립한 EMR4DW 인터넷 홈페이지(www.emr4dw.org) 첫 화면에는 ‘EMR 목표’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개도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자의무기록 시스템과 개도국에서 필요한 의약품, 소독용품(드레싱)을 제공해 질병을 줄이고 건강을 지킨다.’

    실제로 EMR 시스템을 도입한 우간다 진료소의 경우 평균 월 400달러(약 44만6000원), 연 5000달러(2015년 기준) 약값을 절약했고, 환자 5만5000명의 의무기록을 저장했다. 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에게 의약품과 소독용품을 무료 제공하며, 어린이 환자에겐 무료 진료를 했다. 스미스 씨는 “진짜 값진 결실은 EMR라는 작은 시스템이 개도국에 가져다준 큰 변화”라고 단언한다.

    “예순살이 넘은 저에게 지난 5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제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어요. 한국 같은 보건환경 선진국에선 적용되지 못할 단순한 EMR 시스템이 개도국 주민과 지역 보건환경을 크게 바꿨으니까요.(웃음)”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 의료진의 봉사정신과 보건환경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했다. 

    “우간다에서 의료봉사를 할 때 한국 의료진을 만났는데, 그들의 열정적인 봉사활동에 크게 감동했어요. 그분들과 저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세상에 베푼다는 공통점이 있죠. 그래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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