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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 자유형 수영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자유형은 19세기, 접영은 20세기에 탄생

  • 입력2018-07-10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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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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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극에서 수영하는 장면이 등장할 때가 있다. 대개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탁월한 헤엄 실력으로 구해내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때 연기자는 대부분 자유형을 구사한다. 요즘 수영장에 가면 가장 많이 하는 영법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고증과 동떨어진 짓이다. 

    실제 서양 최초의 수영교본으로 일컬어지는 영국학자 에버라드 딕비의 ‘수영의 기술’(1587)은 안전하게 입수하는 법, 물속에서 나아가는 법, 회전하기, 뜨기, 잠수와 다이빙 등 현대 수영교본에 등장하는 모든 기술을 다룬다. 이 책에는 4가지 영법이 소개되는데 평영, 배영, 횡영, 그리고 개헤엄이다. 오늘날 4대 영법인 평영, 배영, 접영, 자유형(free style)과 구성부터 다르다. 

    1930년대 처음 개발된 접영은 논외로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자유형이라 부르는 크롤 영법까지 빠져 있는 이유는 뭘까. 크롤 영법은 1844년 영국 런던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웨니시카 웬비(나는 갈매기)와 사바(담배)의 시연을 통해 서방 세계에 처음 알려졌다. 팔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려 휘저으면서 번갈아 발차기하는 영법을 구사한 이들 원주민은 평영을 한 영국 선수들을 제치고 1, 2위를 차지했다.

    자유형의 대명사가 된 크롤

    ‘오스트레일리안 크롤’을 퍼뜨린 호주 수영선수 리치먼드 캐빌(왼쪽), ‘아메리칸 크롤’을 개발한 찰스 대니얼스. [위키피디아,ISHOF]

    ‘오스트레일리안 크롤’을 퍼뜨린 호주 수영선수 리치먼드 캐빌(왼쪽), ‘아메리칸 크롤’을 개발한 찰스 대니얼스. [위키피디아,ISHOF]

    이를 본 영국인들은 놀라긴 했지만 ‘신사답지 못하다’ ‘유럽인답지 않다’며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기괴한 짐승의 몸짓(grotesque antics)이란 반응도 있었다. 이 영법을 일컫는 크롤은 짐승이 네 발로 포복하듯 기어가는 형상을 일컫는 용어였다. 

    그렇게 30년 넘게 잊힌 크롤은 1875년 영국의 한 수영대회에서 변형된 형태로 재등장한다. 남미 원주민으로부터 크롤 영법을 배운 영국 수영선수 존 트러젠이 크롤의 팔 동작과 평영의 발차기를 접목한 것이었다. ‘트러젠 영법’은 오늘날 인명구조 영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크롤 영법이 대중화된 데는 호주 수영 명문인 캐빌 가문의 공로가 크다. 도버해협 횡단에 도전해 유명해진 영국 수영선수 출신으로 호주로 이주한 프레드릭 캐빌과 여섯 아들로 이뤄진 캐빌가(家)는 현대 수영에 크롤 영법과 접영을 도입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1890년대 남태평양 솔로몬제도 원주민 출신인 앨릭 위컴이란 소년이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수영대회에 출전해 고향에서 유행하던 영법을 선보인다. 머리를 물에 담그지 않고 스트로크를 할 때마다 좌우로 돌려 호흡하는 크롤 영법이었다. 캐빌가 사람들은 이에 주목해 4킥 1스트로크로 구성되고 2스트로크마다 고개를 들어 호흡하는 ‘오스트레일리안 크롤’로 발전시켰다. 

    캐빌가의 다섯째인 시드니(1881~1945)가 접영의 상체 스트로크를 개발했다면 막내아들 리치먼드(1884~1938)는 크롤 영법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는 국제수영대회에서 크롤 영법을 처음 선보였으며, 1902년 런던 수영대회에서 100야드(91.44m)를 1분대 이하로 돌파한 최초 수영선수로 기록됐다. 

    미국 수영선수 찰스 대니얼스(1885~ 1973)는 이를 이어받아 6킥 1스트로크로 이뤄진 오늘날의 크롤 영법(아메리칸 크롤)으로 완성시켰다. 대니얼스는 이 영법으로 1904 세인트루이스올림픽과 1908 런던올림픽 수영 자유형에서 금메달 4개 포함, 모두 7개 메달을 휩쓸었다. 당시 올림픽은 평영, 배영, 자유형 3개 종목으로만 구성됐는데 모든 영법으로 경쟁이 가능한 자유형에서 미국과 호주 수영선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트러젠 영법을 구사했다고 한다. 크롤 영법이 자유형의 대명사가 된 이유, 미국과 호주가 오늘날까지 수영강국으로 군림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신대륙이 수영 선진국인 이유

    세계 최초의 지상수영장으로 꼽히는 인도 모헨조다로 대욕탕. [이케이북]

    세계 최초의 지상수영장으로 꼽히는 인도 모헨조다로 대욕탕. [이케이북]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같은 구대륙이 아니라 미주, 호주 같은 신대륙이 수영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토박이들의 수영법을 적극 도입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수영에 관한 한 태평양 일대 원주민이 가장 앞서 있었다는 소리다. 

    왜 그럴까. 영국의 논픽션 작가이자 수영코치인 에릭 샬린이 지은 ‘처음 읽는 수영 세계사’에 따르면 인류가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유인원과 달리 완벽한 이족보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닷가나 강가에서 생활하며 수영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수생 유인원 가설’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고인류 유적에서는 어김없이 거대한 조개무지가 발견된다. 원시 인류가 물가에 살면서 수영, 잠수를 통해 식량을 마련하는 추진력을 얻기 위해 발과 다리가 유선형으로 발달하고, 수중에서 정확한 채집을 위해 손을 많이 활용한 것이 이족보행과 손재주, 두뇌발달로 이어졌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갓난아기를 물속에 넣으면 바로 수영할 수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10만~6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 인류가 다른 대륙으로 이동할 때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던 것 역시 항해기술만큼 수영기술도 큰 역할을 했을 공산이 크다. 게다가 유라시아에선 추운 날씨와 더불어 벌거벗은 몸을 경원시하는 종교의 영향으로 물과 접촉 기회가 점차 줄어들었다. 반면 아열대기후 지대가 많은 신대륙에선 수영이 생존과 생활을 위한 필수요소였다. 신대륙에서도 상대적으로 추운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이 유목민·사냥꾼으로 변모한 데 반해, 따뜻한 남아메리카와 호주 원주민은 수영, 잠수를 하는 수산자원 채집꾼으로 안온한 삶을 살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구대륙에서도 수영과 관련된 다양한 고대 유적과 기록이 발견된다. 세계 최초의 폐쇄적 지상수영장은 기원전 2000년 전후로 지어진 인도 모헨조다로 대욕탕이다. 가장 깊은 곳이 2.4m에 이르기 때문에 목욕탕을 넘어 수영장 기능까지 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집트 벽화에서는 크롤 영법과 비슷한 자세로 수영하는 사람이 발견됐다. 또 해군력이 막강하던 아테네, 고대 바다를 지배한 바이킹, 해상무역국가였던 베네치아에서도 수영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세부터 익사 두려움과 감염 공포, 그리고 나신에 대한 거부감으로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선 수영 자체가 금지된 곳이 많았다. 이 때문에 구대륙에도 크롤 영법이 있었지만 중세 이후 유실됐을 개연성도 제기된다.

    이런 상황은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관광문화가 발달하는 18세기부터 바뀌게 된다. 방치된 바닷가와 호숫가가 관광지로 개발되고, 19세기 무렵 오락과 스포츠로서 수영이 재발견되며, 실내수영장이 지어졌다. 실제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부활할 때부터 수영은 육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종목이었다. 하지만 고대 올림픽에선 아예 물에서 하는 종목 자체가 없었다. 4대 영법 가운데 절반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탄생했다. 스포츠로서 수영은 근대에 재발견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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