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0

2015.03.23

“즐거운 희생 감내할 미친 지도자 나와야”

오동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 김화성 스포츠칼럼니스트 marsstella@naver.com

    입력2015-03-23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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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희생 감내할 미친 지도자 나와야”
    오동진(67·사진) 대한육상경기연맹(육상연맹) 회장은 온유하다. 부드럽고 정갈하다. 목소리도 나직하고 봄바람 같다. 하지만 속은 갈매나무처럼 단단하다. 배춧속처럼 꽉 차 있다. 모든 일에 치밀하고 준비가 철저하다.

    그는 2009년 1월 삼성전자 북미총괄사장으로 있다 22대 육상연맹 회장으로 ‘차출’됐다. 엉겁결에 임기 4년이 후다닥 지나갔고 2013년부터 2기에 들어서 벌써 3년째다. 그는 1기 임기를 마친 소감을 어느 인터뷰에서 “낙제점이다. 창피하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 육상은 지난해 안방에서 열린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은메달 4개, 동메달 6개로 14위에 그쳤다. 금메달은 하나도 없다. 자존심 강한 오 회장의 가슴속은 묻지 않아도 숯덩이처럼 새카맣게 탔을 것이다. 오죽하면 스스로 “한국 육상은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 신세다. 이젠 To be, or Not to be!”라고 한탄했을까. 3월 17일 서울 잠실주경기장 육상연맹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올해는 이 땅에 근대 육상이 들어온 지 120년 되는 해다. 어떤 학자는 한국 근대육상의 시작을 1896년 관립외국어학교인 영어학교 운동회 ‘화류회’로 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1895년 을미의숙 운동회를 그 시초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올해는 한국 육상이 두 회갑을 맞는 뜻 깊은 해다. 광복일을 기준으로 육상연맹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말 기적이다. 묵정밭 같은 천수답에서 홀연히 영웅이 나타나 화르르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식으로 이어져왔다.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에서 황영조, 이봉주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더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또다시 그런 영웅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뭔가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는 튼튼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천수답 한국 육상에 꿈과 열정의 씨앗을 뿌리고 싶었다. 재임 기간에 큼직한 주춧돌 하나 놓고 싶었다.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 언젠가 그곳에서 수많은 스타가 나올 수 있기를 바랐다. 35년 동안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다. 그중 22년을 해외에서 떠돌았다. 1970년대 세계 가전시장에서 일본 소니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우리가 못 따라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온몸으로 부닥치고 깨지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 벽을 넘어 삼성전자가 세계 1위가 됐다. 한국 육상이라고 그렇게 못 할 게 뭔가. 나는 할 수 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작은 밀알만 돼도 대만족이다.”

    오 회장의 진단은 옳다. 하지만 리더 혼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먼저 선수와 지도자부터 바뀌어야 한다. 한국 육상인의 사고방식이 송두리째 새로워져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매너리즘으로는 백년하청이다. 물론 육상연맹의 치밀하고 세심한 전략과 지원은 기본이다.

    “즐거운 희생 감내할 미친 지도자 나와야”

    2012년 6월 육상 꿈나무 시상식을 마치고 격려하는 오동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주인의식 있는 육상으로 바꿀 것

    최근 세계 장대높이뛰기의 신화인 우크라이나 세르게이 붑카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육상선수는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해서 박사 수준이 돼야 한다. 스스로 대학교수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그만큼 선수 스스로 ‘왜 안 될까, 내 문제는 뭘까’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육상선수들은 어떨까. 대부분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포츠는 결국 개인사업이다. 육상은 더욱 그렇다. 기업에서 제품을 만들 때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품질이 좋아진다. 하지만 사람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너무 힘들다. 주인의식이 없으면 아무리 돈을 풀고 전략을 세워봐야 말짱 황이다. 한국 육상은 지도자부터 달라져야 한다. 쇼트트랙의 전명규 감독이나 양궁의 서거원 감독 같은 미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육상은 황영조, 이봉주, 김완기를 길러낸 정봉수 감독 이후로 그런 맥이 끊겼다. 어느 조직이든 기꺼이 내 몸을 던지는 ‘즐거운 희생자’가 나와야 발전한다. 머리 좋고 스펙 좋은 사람이 최고가 아니다. 뭔가 해보겠다는, 눈이 활활 불타오르는, 그런 열정과 도전의식을 가진 사람이 으뜸이다.

    일부 지도자는 우리가 지금 세계 육상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그 좌표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불평불만에 남 탓만 많이 하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다. 영락없이 ‘밑 빠진 소쿠리’요, ‘끼리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문화’다. 한 해 전국체전과 도민체전 두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프로는 어디를 봐도 아름답다. 속은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지만 겉으로는 무덤덤하다. 자기희생 가운데 엄청난 노력을 하면서도 결코 티를 내지 않는다. 물론 선수라고 예외는 아니다. 마침 붑카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나는 선수 시절 경기 시작 전에 이미 50번 이상 시뮬레이션을 마친다’고 하더라.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완벽하게 끝내고 경기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니 뛰기 전 이미 뛴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경기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무아지경(ZEN·禪)에서 날아오른다. 그게 바로 프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깨어 있는 선수가 정녕 프로인 것이다. 과연 우리 선수 가운데 그런 선수가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한국 육상의 등뼈는 누가 뭐래도 마라톤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 마라톤은 제자리는커녕 뒷걸음질치고 있다. 3월 15일 열린 서울국제마라톤에서 국내 최고기록은 유승엽 선수가 세운 2시간13분10초다. 이는 이봉주가 2000 도쿄마라톤에서 세운 한국기록 2시간7분20초에 5분50초나 늦은 기록이다. 15년 동안이나 시곗바늘이 뒤로 가고 있다. 세계기록 2시간2분57초(케냐 데니스 키메토)와는 까마득히 먼 10분13초 차이가 난다.

    “즐거운 희생 감내할 미친 지도자 나와야”
    될성부른 종목, 선택과 집중

    사실 육상 단거리나 마라톤에서 한국 선수가 세계 수준을 따라가기엔 한계가 있다. 세계는 날아가는데 한국은 기어가고 있다. ‘아프리카 선수 수입론’이 고개를 드는 이유다. 마침 이번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6분11초로 우승한 케냐의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7)가 한국 귀화를 희망하고 있다. 중동국가들은 이미 ‘용병 수입 효과’로 저만치 한국을 앞서가는 상황이다.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에도 문태종 등 귀화선수가 뛰고 있다. 아이스하키 등 다른 종목들은 벌써부터 외국선수들을 착착 귀화시키고 있다.

    “육상연맹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마라톤뿐 아니라 단거리나 다른 종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단거리나 마라톤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마중물로 활용해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우리가 육상 47개 전 종목을 모두 잘할 수는 없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기술을 요구하고 도구를 사용하거나 남들이 꺼리는 종목이 유리하다. 허들, 릴레이, 장대높이뛰기, 높이뛰기, 경보 같은 게 그렇다. 아직 어리지만 김병준(허들), 진민섭(장대), 우상혁(높이뛰기) 같은 선수가 쑥쑥 크고 있는 걸 보면 뿌듯하다. 이들은 현재 세계랭킹 30위 안팎인데 이대로만 뻗어준다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충분히 결선(8강)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선수도 미치고, 지도자도 미쳐야 한다. 스스로 갈고닦아 발광(發光), 즉 빛을 내야 한다.”

    육상연맹은 지난해 대한체육회 57개 가맹단체 가운데 최우수단체로 뽑혔다. 그 어느 단체보다 행정력이 투명하고 지원 시스템이 잘돼 있다는 객관적 평가인 셈이다. 또한 육상연맹은 2012년 국내 경기단체 최초로 온라인 지도자 교육훈련 시스템인 ‘육상 이러닝(e-Learning) 센터’를 구축하고, 누구나 최고 수준의 육상 훈련법을 공부할 수 있는 인프라도 만들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을 통해서도 훈련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준비 중이다. 모두 오 회장의 열정이 낳은 결과다. 사실 육상은 모든 종목의 맏형이다. 모든 스포츠의 ‘오래된 미래’다. 국민 모두가 즐기는 스포츠다. 아마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걷기까지 포함하면 아마추어 육상 인구는 1000만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통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육상연맹도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다. 더는 엘리트 선수 위주의 정책만 펼 수 없다. 생활체육 부문에 뭔가 마스터플랜을 내놓아야 한다.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국민이 육상을 즐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요즘 인기 있는 ‘우리동네 예체능’ 같은 TV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이젠 스타디움 트랙에서 벗어나 도심이나 동네로 다가가야 한다. 이미 시행 중인 키즈 프로그램은 지방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이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장대높이뛰기 대회를 연다거나 시민들이 참가하는 즉석 미니운동회 같은 것도 해봄직하다. 일반인 기록인증제도 실시하려 한다. 육상강국은 하나같이 선진국이다. 비싼 요금을 내고 가족 단위로 육상경기를 보러온다. 선진국이 돼야 육상이 발전하는지, 아니면 육상강국이 돼야 선진국이 되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육상강국은 선진국의 필수조건이다. 하루빨리 한국 육상에서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수영의 박태환 같은 선수를 내놓아야 그걸 불쏘시개, 즉 터닝포인트로 삼아 날아오를 수 있다. 한국 엄마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육상경기장에 오는 날, 한국 육상은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다.”

    “가장 위험한 도전은 도전하지 않는 도전”

    오 회장의 꿈은 재임 기간 ‘제대로 된 지도자 몇 명이라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하든 한국 육상이라는 허허벌판에 불을 지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간 한국 육상 지도자가 태권도나 양궁, 쇼트트랙처럼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그는 삼성전자 재직 시절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을 몸소 겪었다. 한 고비를 넘으면 또 한 고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위험한 도전은 도전하지 않는 도전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해보지도 않고 주저앉는 게 가장 위험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릴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밖에 없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슨 부를 더 쌓겠는가, 아니면 명예를 얻겠는가. 모든 병폐는 뿌리 뽑고 낡은 관행은 깨부숴야 한다. 어떻게 하든 한국 육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피나는 경쟁의 생활화 시스템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목표가 뚜렷해야 하고 위아래 소통이 잘돼야 한다.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육상인 모두가 눈높이를 세계 초일류 수준에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운도 따르는 것이다. 기록으로는 세계 3류도 안 되는 선수가 대우는 세계 일류급으로 받는다면 그게 말이 되는가. 오로지 등수에만 관심 있고 기록이나 숫자에 무감각한 선수 또는 지도자가 무슨 육상인인가. 육상에서 0.001초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인간 오동진은?

    소탈한 인문주의자…‘대충’ ‘대강’이란 말 제일 싫어해


    오동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소탈하다. 음식도 시래기나 채소를 즐긴다.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심정적인 불자’로 인정한다. 고향은 경남 산청 산골.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휘문중, 휘문고를 거쳐 성균관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다. 인사팀장, 감사팀장, 경영지원팀장, 동남아총괄부사장을 거쳐 2009년 북미총괄사장을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물러났다. 그만큼 그는 철저하게 삼성맨이다. 무역의 날 철탑산업훈장(2001), 한미커뮤니티재단 제1회 자랑스러운 기업인상(2006)을 받았다. 네 살 아래 부인은 중매로 만났다. 슬하에 1녀(36) 1남(34).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잘될 겁니다’ 하는 것이다. ‘대충’ ‘대강’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삼성문화에선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대한육상경기연맹에 부임해 가장 적응이 안 됐던 부분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뜨뜻미지근한 게… 그저 속으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주일에 많게는 5권 이상 책을 읽는다. 22년 동안 해외를 떠돌아다니며 비행기나 호텔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습관이다. 역사, 종교, 철학, 수필 등 가리지 않는다. 최근엔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일본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공동으로 쓴 ‘미움받을 용기’를 인상 깊게 읽었다. 뇌과학자인 김대식 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나 철학자인 최진석 서강대 교수 등의 인문학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많은 것을 깨닫거나 배운다. 젊은 날 마구잡이로 읽어댔던 지식들이 어렴풋하게나마 둥글게 하나로 엮이는 것 같다. 가끔 휴가 땐 해외 역사유적지나 박물관도 찾는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인간 근원에 대한 탐구가 많아졌다. 공자님 말씀처럼 ‘배우고 때로 익히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늘그막에 ‘지적 쾌락’이라고나 할까. 마음속에 늘 ‘겸겸(謙謙)’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지낸다. ‘겸손하고 또 겸손하라’는 뜻인데, 그동안 살면서 훌륭한 분들을 만나보니 하나같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췄다. 주역 64괘 가운데 63괘가 모두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일도 있다’고 풀이하는데 오로지 ‘겸겸’ 한 괘만 ‘아주 좋다’고 나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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