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6

2017.12.06

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생리통 치료약은 왜 없나요?”

사회 편견이 유발한 ‘수행되지 않은 연구’

  • 입력2017-12-05 1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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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 앞에서 임신 중단 합법화를 촉구하는 여성 모임 ‘BWAVE’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왼쪽). 시민단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9월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낙태죄
폐지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뉴스1]

    11월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 앞에서 임신 중단 합법화를 촉구하는 여성 모임 ‘BWAVE’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왼쪽). 시민단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9월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낙태죄 폐지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뉴스1]

    과학계에서 유행하는 용어 가운데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가 있다. 과학학자 데이비드 헤스가 고안한 말이다. ‘수행되지 않은 연구’라는, 입에 붙지 않은 번역이 있다. 거창해 보이지만 간단한 문제의식이다. ‘어떤 과학기술은 왜 세상에 없을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데 여성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이 질문을 받은 상당수 여성은 약속이라도 한 듯 ‘생리’나 ‘생리통’ 문제를 제기한다. 마침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생리통 때문에 고생하는 소설 속 지영은 뜨거운 물이 담긴 페트병을 수건에 말아 끌어안은 채 이렇게 투덜댄다.

    “이해할 수가 없어. 세상의 절반이 매달 겪는 일이야. 진통제라는 이름에 두루뭉술하게 묶여 울렁증을 유발하는 약 말고, 효과 좋고 부작용 없는 생리통 전용 치료제를 개발한다면 그 제약회사는 떼돈을 벌 텐데.”

    언니가 답한다.

    “암도 고치고 심장도 이식하는 세상에 생리통 약이 한 알 없다니 이게 무슨 일이라니. 자궁에 약 기운 퍼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나 봐.”



    그렇다. 왜 제약회사는 생리통 치료제를 개발할 생각을 하지 않을까. 참, 흔히 ‘생리통엔~’ 이런 식으로 선전하는 약은 알다시피 소염진통제다. 진통만 없애주는 게 아니라 소염 작용까지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가기 십상이다. 의사들이 생리통 진통제로 소염 작용이 없는 아세트아미노펜 계열 약을 추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잠시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시만 해도 여성 생리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없었다. 대다수 남성 의사는 여성의 생리통을 ‘임신을 했어야만 하는 자연 법칙에 순응하지 못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여성의 생리를 정상이 아닌, 일종의 질병으로 보는 19세기 시각을 고수하는 이도 있었다.


    “생리통, 임신 안 하는 여성이 치러야 할 대가”

    당시는 참정권을 비롯한 여성의 사회 참여 요구가 높을 때였다. 이런 흐름에 반발하며 대다수 남성 의사는 생리를 여성이 집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증거로 제시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해야 하는 여성은 남성과 함께 고등교육을 받거나 같은 직장에서 일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무리할 경우 출산 기능에 심각한 장애가 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견해는 1930년이 돼서야 비로소 교정됐다. 생리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사라질 수 있었던 건 앨리스 샌더슨 클로, 위니프리드 컬리스 같은 여성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리가 아픈 상태가 아닌 지극히 정상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10년 이상 고군분투했다.

    생리를 둘러싼 이런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살펴보면 21세기가 돼서도 변변한 생리통 약이 등장하지 못한 사정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남성 다수가 지배하는 의학계, 과학계에서 여성의 생리와 생리통에 관한 진지한 관심이 적었을 테니까. 상상해보자. 만약 의학계, 과학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컸더라도 상황이 이 지경이었을까.

    또 다른 예도 있다. 갈수록 난임 부부가 늘면서 ‘시험관 아기 시술(IVF)’ 같은 생식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시험관 아기가 최선일까. 정자와 난자를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뒤 임신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심각한 부작용을 감수한다. 먼저 배란촉진제를 맞아 난자 여러 개를 배란해야 한다. 그렇게 나온 난자는 여성 몸에서 ‘채취’돼 시험관에서 정자와 만나 수정란이 된다. 그 수정란이 여성 자궁 안으로 들어가 배아 상태에서 ‘착상’돼야 비로소 임신이 된다. 이 과정에서 성공률을 높이고자 여러 개의 배아를 자궁에 집어넣는데, 난임시술로 태어난 아이 가운데 쌍둥이가 많은 건 이 때문이다. 쌍둥이 등은 임신부의 조산 위험을 높이는 위험 요소다.

    그런데 난임시술에 시험관 아기만 있는 게 아니다. 정자의 활동성이 떨어져 임신이 안 되는 경우에는 건강한 정자만 골라내 배란 상태인 여성의 자궁에 집어넣는 ‘인공수정(IUI)’이 효과적이다. 인공수정은 시간이 짧게 걸리고 무엇보다 여성 몸에 부담이 적다. 그런데 왜 난임시술 하면 모두 시험관 아기만 떠올리는 것일까.


    출산은 의무, 낙태는 불법?

    상당수 여성이 수십 년 동안 생리통으로 고통받지만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shutterstock]

    상당수 여성이 수십 년 동안 생리통으로 고통받지만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shutterstock]

    최근 낙태 합법화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추정에 따르면 한국의 임신중절 수술, 즉 낙태수술 건수는 하루 평균 3000건가량이다. 연간 약 100만 건! 더 놀라운 것은 낙태수술이 대부분 불법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1973년 만들어진 낙태를 금지하는 법(형법 제269조)과 강력한 낙태 허용 제한 조건(모자보건법 제14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성폭력이든, 경제적 이유든 혹은 말할 수 없는 개인 사정이든 원치 않은 임신을 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성폭력에 의한 임신은 모자보건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낙태수술을 할 수 있다). 불법인데도 수요가 많으니 낙태수술 비용이 당연히 비싸질 수밖에 없다. 지역과 임신 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낙태수술 1건에 100만~150만 원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낙태수술이 비싸다 보니 심각한 부작용도 나타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10대 청소년이 수술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쉬쉬하다 결국 임신 중절이 가능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청소년의 신생아 유기가 잊을 만하면 뉴스거리가 되는 것도, 또 부모 될 준비가 안 된 10대와 아기의 고단한 삶도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한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20만 명 넘는 시민이 낙태죄 폐지 민원을 제기했고, 결국 청와대가 실태 조사에 착수해 사회적 토론을 시작하기로 했다(11월 26일 현재). 헌법재판소도 낙태죄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현실에 맞게끔 낙태죄가 조정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수십 년 동안 변변한 치료약 하나 없이 한 달에 한 번씩 생리통을 겪고, ‘출산은 의무’라는 편견 탓에 난임시술 부담을 감내하며, 심지어 원하지 않은 임신도 ‘낙태는 불법’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여성의 현실은 분명히 잘못됐다. 지난해 태어난 여자아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름이 ‘서윤’이다. 2046년 서른 살 서윤 씨는 지금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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