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1

2017.01.11

강유정의 영화觀

순수하면서도 강력한 유년의 기억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7-01-09 16: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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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우리는 간밤에 꾼 꿈 때문에 하루 종일 설레곤 했다.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악몽 때문에 불안해하던 적이 있고, 아직은 금기시되던 어른의 사랑을 꿈에서 경험하며 남몰래 흥분과 죄책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랬다. 한때였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부터는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설레거나 이상한 꿈보다는 대개 왜 그런 꿈을 꿨을지 짐작 가능한 상투적인 꿈을 꾼다. 말하자면 미지의 세계에 닿는 출구였던 꿈의 공간이 닫혀버린 것이다. 그렇게 닫힌 꿈의 세계 이후 우리는 꿈이 없는 사람, 즉 어른이 된다. 어른은 스무 살에 되는 게 아니라 그렇듯, 신체적인 꿈과 이념적인 꿈 사이가 끊어지면서 되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이처럼 꿈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워낙 예민해 꿈인지 현실인지 짐작조차 못 하지만 이상한 꿈에 마구 빠져들 수 있던, 그런 소년, 소녀 시절 말이다. ‘너의 이름은.’은 장르적으로 따지면 그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던 로맨스, 판타지가 어우러져 있다.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타임슬립이 등장하고, 소설 ‘에브리데이’나 영화 ‘스위치’처럼 사람 몸이 서로 바뀌는 설정도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설정이 바로 ‘꿈’이다. 소년, 소녀인 두 주인공은 꿈속에서 서로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 일본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 사는 소년이 되고 싶던 작은 시골 마을 소녀의 소원이 이뤄져, 비록 간헐적이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 몸이 바뀌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꿈이 깨고 나면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사라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꾸는 꿈이 대부분 그렇듯, 꿈속에서 간절하게 기억하고 싶던 일이 잠에서 깨고 나면 기억의 모서리 어딘가가 부서지듯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서진 모서리는 성장이라는 단어와 가깝다. 우리는 현실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꿈의 모서리를 자주 놓친다. 꿈을 기억하고 환기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는 게 아마도 이유일 테다. 꿈, 성장, 현실 같은 보편적 주제 위에 ‘너의 이름은.’은 대재앙이라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장애물을 보탠다. 시골 마을을 덮친 유성, 그래서 모두 다 죽게 된 사람들, 완전히 사라진 마을. 짐작하겠지만 이 대재앙은 여러모로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3·11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여행이라는 영화적 설정은 대재앙을 막으려는, 하지만 인류라는 큰 보편성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꿈에서 만난 소녀를 위해서라는 소박한 구체성 덕에 공감도가 높아진다. 대재앙이라는 사회역사적 문제가 소년, 소녀의 만남과 성장, 사랑이라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체성과 보편성의 황금비율이 바로 영화 ‘너의 이름은.’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신카이 감독의 섬세한 감각과 예민한 문법은 이미 일종의 작가적 개성으로 승인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소하고 협소한 개인의 감성에 보편적이며 시대적인 문제를 결합하는 방법을 바로 이 작품에서 보여줬으며, 대중적 호응을 얻는 데도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던 일본 애니메이션, 즉 저패니메이션의 감성이 새로운 세대의 감성으로 연착륙했다는 증표로 받아들여진다.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어떤 한 조각을 다시 생각게 하는 작품, ‘너의 이름은.’이 가진 순수하면서도 강력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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