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9

2016.12.28

<새 연재> 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 1

내달리는 곡선

곡선의 역동성은 빠르게, 느리게, 이쪽으로, 저쪽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끈다

  • 신연우 마음디자이너 dal_road@naver.com

    입력2016-12-23 17: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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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오픈한 쇼핑몰을 구경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상점과 레스토랑이 들어선 쇼핑몰은 층층마다 사람으로 가득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어디나 혼잡하다지만, 이곳은 유난히 어지러운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 레스토랑의 대기 라인에 서서 넋을 놓은 채 주변을 보니 지나는 사람의 물결 위로 곡선이 흐르고 있었다. 작은 원형 조명들을 연결한 천장의 검은색 곡선은 흰 바탕과 명도 대비를 이뤄 유난히 또렷했다. 멈추는 지점 하나 없이 어디론가 내달리는 참으로 곡선이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어질어질하다. 매끈하게 휘어진 곡선은 어느 한쪽 힘의 치우침도 없다. 팽팽한 긴장에 사로잡힌 시선이 선을 따라 롤러코스트를 탄다. 공기나 물의 저항을 최소화한 유선형이 연상되는 속도감이다.

    1930년대 유선형 디자인의 선두주자였던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는 제품 외관을 유선형으로 스타일링해 주목받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철도회사를 위해 디자인한 증기기관차 S1이 대표작 중 하나다. S1 디자인은 요즘 시대 기차라 해도 아쉬울 게 없을 만큼 날렵한 형태를 뽐낸다. 긴 기차의 가로선을 따라 직선으로 흐르는 선은 기차 앞머리에서 커브를 그리며 매끄러운 형태를 완성한다. 공기의 저항을 뚫고 나아가는 날렵한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선이다. 기능을 더하는 선의 모양 덕에 기존 성능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최신형 기차로 변신한 것이다. 이러한 선의 모양은 경제대공황으로 위축된 당시 사람들에게 차별화된 기능의 제품을 만나는 것 같은 시각적인 환상을 심어줬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속도로 갈 것인가

    은연중에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선은 행동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는 일본 나리타국제공항의 저가항공사(LCC) 전용 터미널 내부를 저렴한 비용으로 디자인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에서 잘 드러난다. 마치 실내 스타디움을 옮겨온 듯한 풍경이다. 조명이나 사인보드 대신 트랙의 색과 방향으로 정보를 표시했다. 푸른색 트랙은 비행기 출발 장소이고 붉은색 트랙은 도착한 사람들이 지나갈 길로, 트랙 위에 픽토그램을 표시해 정보를 알린다. 직선 트랙을 걷다 갈림길이나 목적지에 도달하면 완만한 곡선 트랙이 나타나 원하는 지점으로 들어가도록 유도한다. 보행자는 바닥에 덧씌운 트랙에 마음을 맡기고 선을 따라 흘러간다. 선은 시선을 이끄는 힘이 있다.

    선의 역동성은 빠르게, 느리게, 이쪽으로, 저쪽으로 의도한 대로 사람 마음을 유도한다. 시선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뇌가 눈의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며 함께 작동한다. 눈은 시각 정보를 수집해 뇌로 전달하고, 뇌는 가설을 설정해 눈이 다른 부분을 보도록 명령한다. 뇌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내용이 변화되기 전까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순환 고리는 반복된다(로버트 L. 솔소의 ‘시각심리학’).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회화 작품을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외적 형태가 아니라, 이들 형태 속에 살아 있는 힘”이라고 말했듯, 내적 세계에서 형성된 방향성이 외적 세계로 나타나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을 움직여 행동까지 이끌어낸다.



    기하학에서 말하는 선이란 점이 움직인 흔적이다. 머무르는 성질의 점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자 하는 내적 에너지를 밖으로 표출하면 선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비행기가 지나간 뒤 하늘에 남은 선만 보고도 ‘빠르다’고 생각한다. 땅에서 보면 점같이 작은 비행기가 움직여 선을 형성하는 것처럼, 고유한 내적 에너지의 성격에 따라 속도와 방향이 결정된다.

    쇼핑몰에서 느낀 어지러움은 천장의 곡선 속에 살아 있는 긴장, 즉 방향과 속도의 힘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맞닥뜨린 선의 속도와 방향이 내적 세계와 어긋나면 혼란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속도로 갈 것인가, 내면의 선을 그리는 권한은 오직 자신에게 있다. 두둥실 뜬 밤하늘 달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바삐 달린 하루를 마무리하는 선의 끝, 고요한 점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연우
    는 디자인, 영화, 사진, 광고 등 시각코드 사례의 인문학적 통찰을 통해 일상의 장면을 돌아보고 마음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는 강의와 글쓰기 및 창작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저서로 ‘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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