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4

2018.04.18

황승경의 on the stage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잊고 있던 본성 건드린 걸작

연극 | ‘처의 감각’

  • 입력2018-04-18 16: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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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남산예술센터]

    [사진 제공 · 남산예술센터]

    충남 공주의 옛 지명은 고마나루(곰나루),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다. 이곳에는 ‘곰 사당’인 웅신단(熊神壇)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공주 연미산에서 나무꾼과 곰은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 둘을 낳고 산다. 그러나 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무꾼은 인간세상으로 도망가버린다. 곰은 금강을 건너는 남편을 돌아오게 하려고 강나루에서 아이들을 들어 보이지만 매정한 남편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분노한 곰은 아이들을 금강에 빠뜨리고 자신도 빠져 죽는다. 이후 금강에 풍랑이 자주 일자 사당을 지어 곰의 원혼을 위로했다는 전설이다. 

    공주 곰사당 신화를 모티프로 한 연극 ‘처의 감각’(극작 고연옥, 연출 김정)이 지난해 낭독공연을 거쳐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 연극계는 고연옥 작가와 김정 연출이 만든 ‘손님들’로 시작해 ‘손님들’로 끝났다고 할 만큼 모든 연극상을 휩쓸었다. 이 ‘환상의 복식조(組)’가 올해 ‘처의 감각’으로 다시 뭉쳤다. 

    고 작가는 ‘처의 감각’으로 2015년 벽산희곡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각색공연인 ‘곰의 아내’(각색 · 연출 고선웅)가 무대에 올랐으나, 이번 연극 ‘처의 감각’이 첨삭 없이 원작 색채를 그대로 공연하는 만큼 올해를 초연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곰과 인간이라는 비현실적 인물의 대칭처럼 ‘처의 감각’은 기존 연극 틀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공연 직전 무대에는 곧 막이 오를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내 배우들은 무대 구석구석은 물론 객석 통로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마음껏 질주했다. 배우들이 뿜어내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에너지가 극장을 꽉 채웠다. 

    김 연출가는 무대세트 대신 조명으로 시공간을 만들고 허물었다. ‘처의 감각’은 생명력 있는 동물적인 움직임과 인간 내면의 회복 본능을 강조하며 희곡의 신화적 분위기에 다가간다. 



    산에서 길을 잃어 곰과 함께 살던 여자(윤가연 역)가 인간세계로 돌아온다. 여자는 인간으로 살며 남자(백석광 역)를 만나고 아이 둘을 낳는다. 사회 밑바닥에서 그녀는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남자는 여자를 떠난다. 인간세상에 환멸을 느껴 아이들까지 죽인 절망적 순간에 여자는 곰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감각을 느낀다. 그 감각을 따라 여자는 곰을 찾아 나선다. 

    ‘단군신화’를 보면 우리는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먹고 환생한 웅녀의 자손이다. 근원적인 곰의 본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갑질로 군림하며 약자를 짓밟고 핍박한다. 그러나 아무리 극한 상황일지라도 곰의 감각을 되찾는다면 약자도 자기 극복과 회복 의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소 섬뜩한 내용이지만 ‘처의 감각’에는 약자로 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곰의 든든한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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