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2

2016.11.09

국제

달라진 미국 “우리끼리 잘 살자”

꺾이지 않는 트럼프 인기, 그 뒤엔 앵그리 화이트 아메리칸의 지지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 kyle@donga.com

    입력2016-11-07 12: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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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재직한 2013년부터 3년 동안 미국 현지 교민사회의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가 ‘선천적 이중국적자’의 국적 포기 문제였다. 2005년 개정된 국적법은 미국에서 태어나 이중국적자가 된 교포 2세가 만 18세가 된 날로부터 3개월 안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면 38세까지 국적을 포기할 수 없고 병역의무를 지도록 한 조항이 포함됐는데, 일부 교포가 이와 관련해 한국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무지 또는 게으름으로 아들의 국적 포기 기간을 놓친 아버지들이 “아들의 국적을 포기할 기회를 달라”며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아버지의 잘못으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이중국적자가 된 아들이 한국에 가서 돈벌이를 하려면 먼저 군대에 다녀와야 하는 현실적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진즉 한국 국적을 포기했더라면 미국인으로 살면서 병역문제 없이 한국에서 사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만시지탄’이었다.

    태평양을 건너 풍요의 땅 미국으로 오면서 자식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한 아버지들은 왜 뒤늦게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문제는 미국 경제였다. 200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미국 청년들도 일자리가 부족해지자 그동안 한국 교포 2세가 소수인종으로 받아온 ‘취업상의 배려’가 사라졌고, 마땅한 일자리도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교포 청년이 늘었지만 뒤늦게 ‘선천적 이중국적’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대미(對美) 정책 전략 과제로 삼았던 ‘한국인 전문직 취업비자 연간 1만5000개 획득’ 프로젝트가 ‘헛꿈’이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주미 한국대사관이 친한파 연방 의원들을 앞세워 수차례 법안을 발의했지만 관련 입법이 성사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미국 의회 관계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도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인데, 왜 한국인에게 그런 특혜를 줘야 하느냐는 반론이 더 먹혀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밑바닥 여론은 ‘미국 우선주의’

    비단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8년 동안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은 실질적으로 위축됐다. 아이비리그 등 유수 대학은 과거처럼 소수인종 지원자를 우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버지가 부자라 장학금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금수저 백인 학생’을 가려 뽑았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14년 4월 대학 입학전형에서 소수인종 우대정책을 공립대에 적용하지 못하게 한 미시간 주의 헌법 개정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성난 아시아계 학부모는 5월 아시아계를 차별한 예일대 등 명문 사립대를 조사해달라고 교육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의 변화 움직임을 알면 올해 미국 대통령선거(대선)에 불어닥친 도널드 트럼프 열풍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막말과 성추문 전력, 무지와 편견으로 가득 찬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 자리를 움켜쥐고 대선 막판까지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워싱턴의 기득권 세력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와 겨룰 수 있는 힘은 바로 ‘우리끼리 잘 살자’는 ‘앵그리 화이트 아메리칸’의 마음속 지지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오바마 행정부 8년 동안 진행된 미국 내 소수인종 우대정책을 줄여나가는 것은 트럼프가 대선 구호로 내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한 축에 불과하다. 또 다른 축인 △동맹국의 자국 안보비용 추가 부담 요구 △자유무역협정(FTA) 승인 거부 및 재협상 요구도 마찬가지로 이 기간 미국 여론의 밑바닥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워싱턴 싱크탱크들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일부 한반도 전문가는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이 진전되고 있는데 왜 직접 당사자인 한국은 국방비를 복지비에 돌려쓰고 있느냐”는 비판을 공식, 비공식적으로 제기했다. 미국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한 경제계 인사들은 한미 FTA로 미국 경제만 손해 보고 있다며 오바마 행정부 2기 내내 볼멘소리를 해댔다.

    왜 우리는 소수인종과 경제적 약자를 우대해야 하는가. 왜 동맹국의 방위비를 대신 부담해야 하는가. 왜 무역적자를 보면서도 자유무역협정을 확대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기존 어떤 국가, 특히 낡은 유럽국가와 질적으로 다른 ‘예외적인 국가’라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믿음에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한다.

    베트남전쟁 이후 ‘뉴레프트(New Left)’ 운동처럼 미국 젊은이들이 앞장섰다. 피터 베이나트 뉴욕시립대 교수는 2014년 2월 3일 ‘내셔널저널’에 ‘미국 예외주의의 종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싣고 “미국 젊은이들은 아버지 세대보다 애국심에 기초한 일방주의 대외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른 ‘불개입주의’의 확산은 ‘예외주의 국가’라는 미국의 위상을 허물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이나트 교수가 제시한 미국 예외주의의 고전적인 세 가지 측면은 △세계 평화를 명분으로 한 일방적 군사 개입주의(대외정책) △기독교의 나라(종교) △평등한 나라(경제)다. 2009년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대외정책에서 불개입주의(또는 신고립주의)로 회귀 중이고, 제도권 교회는 몰락하고 있으며, 경제 불평등이 심화한다는 점에서 예외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주장이다.



    ‘예외주의’라는 무거운 짐

    미국이 예외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여느 나라와 비슷한 보통의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 트럼프처럼 성적·인종적 차별을 서슴지 않고, 갖은 성추문 전력이 있으며, 부동산 사업과 연방소득세 면세 등으로 떼돈을 번 워싱턴 문외한도 백악관 주인이 될 수 있는 나라,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문학적인 세금을 나라 밖 전쟁과 미군 주둔에 사용하고 젊은이들이 타국에서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 돈이 되지 않는 나라와는 무역장벽을 치고 주판알을 튕기며 관세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 말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한 달 전인 2015년 4월 말 지지자들과 대화에서 “나는 미국 예외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텍사스 주 티파티(강경 보수성향의 미국 시민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미국 예외주의가 무엇이고 지금도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그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 대신 그는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예외적이고 뛰어난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세계를 모욕하고 러시아, 중국, 독일, 일본 같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공화당의 전통적인 믿음인 ‘미국 예외주의’를 부정한 트럼프를 경쟁자인 힐러리도 비난하고 나섰다. 클린턴은 8월 한 유세에서 “우리는 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즐겁다. 이건 예외적인 축복이다. 하지만 그건 심각한 책임이기도 하다. 누가 그것(미국 예외주의)에 동의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경쟁자는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는 많은 미국인은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 지금까지 미국이 하던 대로 예외적인 나라,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체면을 유지한다며 미국인의 세금을 해외에 뿌리고 다니고 폼을 잡을 테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막판까지 클린턴을 몰아붙인 트럼프의 숨은 힘은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회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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