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맘이어도 괜찮아

아기가 사라져간다? 우리가 진짜로 잃어버린 것

배려하는 부부가 둘째 출산 계획하듯, 사회적 배려 절실

  • 입력2019-01-07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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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진 동아일보 기자]

    [김수진 동아일보 기자]

    서울 강남에서 세 살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평일 오후라 붐비지 않을 때였지만 좌석은 모두 차 있었다. 서 있던 아이가 자꾸 비틀거렸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내내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붙잡고 있었다. 등에 멘 가방은 무겁고, 아이가 이 상황에 대해 짜증내며 울음을 터뜨릴까 봐 조마조마해 고작 대여섯 개 역을 가는 것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아이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는데, 그날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며칠을 두고 생각하다 불현듯 그동안 누군가의 배려와 양보 속에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누군가’는 말쑥하게 차려입고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젊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리 차지에 집착한다는 중년의 아주머니, 할머니였다. 

    종종 임산부 배려석이나 노약자 배려석을 놓고 임산부와 나이 드신 분이 갈등을 겪는다는 얘기가 들려오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아기 안은 엄마에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대체로 중년 여성이나 할머니였다. 한 번은 굳이 자리를 양보하는 할머니에게 “다리 아프실 텐데,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할머니는 “아이 데리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이와 지하철을 탈 때면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도 힘들텐데 굳이 일어나 자리를 내주는 것은 따뜻한 ‘배려’요,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공감’이다. 나는 아이에게 선뜻 자리를 내주는 할머니, 어머니에게서 그 공감과 배려를 봤다.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한 채 주변을 외면한 그날 지하철 안 사람들로부터는 “나도 힘들다”는 무언의 외침을 들었다. 그래서 원망할 수 없었다. 

    올 한 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사회적 이슈 가운데 하나는 저출산이다. 매번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감소하는 신생아 수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고, 급기야 ‘아이를 낳으면 250만 원을 준다’는 정책까지 제안됐다. 그러나 저출산을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신생아 수가 줄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살기가 정말 힘들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출산을 장려하기보다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높이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저출산으로 걱정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함께 줄어든다는 점이다. 최근 1~2년 새 인터넷을 달군 ‘노키즈존(No-Kids Zone)’ 논쟁이나 ‘맘충’이란 단어의 유행은 이 같은 경향을 드러낸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는 주변의 배려와 공감이 필요하다. 아기를 돌보려면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가까이를 헌신해야 한다. 특히 초보 엄마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이가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가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엄마의 선의와 관계없이 어린아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채 울고, 떼쓰고, 뭔가를 쏟는 등 말썽을 부리기 마련이다. 이게 아이들의 ‘일상’이고, 그래서 육아가 ‘극한직업’인 것이다.

    아이에게 너그러운 핀란드

    [shutterstock]

    [shutterstock]

    2014년 핀란드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핀란드의 합계출산율은 2010년대 중반까지 1.7~1.8로, 유럽 선진국 가운데 괜찮은 편에 속한다. 당시 나는 엄마가 되기 전이라 육아에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몇몇 ‘특이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비즈니스호텔 식당을 포함해 어디를 가나 아이가 많았고, 공항 탑승장 등 곳곳에 작은 미끄럼틀같이 아이를 위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울면 주변 사람들이 눈총을 주기보다 미소 지으며 함께 달랬다. 호텔 로비 소파나 식당 의자에 뭔가를 흘려도 “아이들이 다 그렇죠”라며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핀란드가 잘사는 북유럽 국가이기 때문일까. 그보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할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저출산 현상의 심화와 더불어 한국 사회가 잃어가는 것은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의 익숙함, 그리고 돌봄이 필요한 대상과 그를 돌보는 사람의 처지에 대한 공감과 배려일지도 모른다. 

    생후 1년 미만 아기를 둔 엄마들의 ‘잠’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문현아·전지원, 2017). 돌 이전 아기를 둔 엄마는 예외 없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지만, 이와 관련된 스트레스는 부부 사이의 공감과 배려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한밤중에 아기가 울어도 아빠는 대체로 깨지 않고 쿨쿨 잔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에서 일하느라 얼마나 힘들까’라며 남편이 잠을 자도록 배려하는 아내가 있는 반면,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계속 자느냐’며 원망하는 아내가 있다. 남편도 아내의 고충을 헤아려 주말에 아내의 자유시간을 챙겨주거나 맛있는 간식을 사들고 집에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도 밖에서 힘들다’고 대꾸하고 마는 사람도 있다. 연구 결과는 예상대로다. 서로를 배려하는 부부가 행복도가 크고, 둘째 출산을 고려하는 비율도 훨씬 높았다. 

    한 친구는 여행 도중 한 시골 식당에서 두 아이가 장난치는 것을 말리면서 밥을 먹이느라 진이 빠진 채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근처 식탁에서 혼자 식사 중이던 어르신이 “참 행복한 가족이다. 보기 좋다”고 웃으며 말해줬다고 한다. 그 친구는 “아이들이 식당에서 민폐를 끼칠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그 어르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기분은 물론, 그 마을에 대한 인상까지 덩달아 좋아졌다”고 했다. 힘든 일상을 지탱하게 하는 것은 소소한 배려와 공감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아이를 더 낳으라고 채근하는 구호가 아니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는 원망 대신, ‘얼마나 힘들까’라는 공감의 마음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구처럼, 새해에는 나부터 좀 더 자세히 보고 공감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외식하는 가족에게 “육아가 힘들겠지만 아이들이 무척 예뻐요. 힘내세요!”라며 먼저 인사할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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