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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연수기

아날로그 감성 살아 숨 쉬는 디자인 수도 Helsinki

변덕스러운 날씨에 골탕 먹고, 유모차와 휠체어 배려 모습에 감동하고

아날로그 감성 살아 숨 쉬는 디자인 수도 Helsinki

아날로그 감성 살아 숨 쉬는 디자인 수도 Helsinki

도심을 그물망처럼 연결하는 트램. 승강장 가까이에 정차하는 트램 덕에 유모차나 휠체어가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다.[구자홍 기자]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 비즈니스스쿨 캠퍼스에서 진행된 알토대 EMBA(Executive MBA) 과정을 이수하고자 헬싱키에 머물던 7월 31일 부터 8월 14일까지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단상을 정리했다.<편집자 주>

헬싱키의 여름 날씨는 우리나라 추석 무렵 청명한 가을과 여름 장마철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아침엔 낮은 구름이 잔뜩 드리운 뿌연 날씨로 시작해 정오쯤 한바탕 폭포수 같은 장대비를 쏟아내면 오후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파란 하늘에서 햇볕이 쨍쨍 내리쬈다. 가방에 접이식 우산을 넣어 다니고, 해 질 녘 쌀쌀해지는 날씨에 대비해 가벼운 점퍼를 갖고 다니는 것은 헬싱키 생활 이틀 만에 터득한 생활의 지혜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식사를 마칠 때쯤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헬싱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버스터미널 캄피(KAMPI) 초입의 잡화점에 들어가 “우산을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상인은 “새 우산은 10유로(약 1만3300원)인데, 중고품이 있으니 5유로만 주고 가져가라”며 중고 우산을 내밀었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당황한 관광객에게 한두 번 팔아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기자도 5유로를 주고 중고 우산을 사들고 학교로 돌아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익숙해서인지, 헬싱키 시민 가운데는 묵묵히 장대비를 맞는 이가 적잖았다. 특히 위아래로 노란 형광색 옷을 입고 일하는 육체노동자들은 비가 아무리 많이 쏟아져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은 호기심이 발동해 우산을 쓰고 다가가 한 노동자에게 물었다.

“왜 잠시 비를 피하지 않고 일을 합니까.” “비는 곧 멈출 겁니다. 지금 일을 멈추면 약속시간까지 일을 마치지 못해요.”



COLD SUMMER

헬싱키의 여름은 비가 자주 내리긴 해도 전혀 습하지 않아 우리 여름과 같은 ‘찜통더위’는 없었다. 도시가 바닷가에 위치한 덕에 늘 바닷바람이 불어와 습한 기운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보였다. 여름 한낮인데도 기온이 그리 높지 않았다. 기자가 헬싱키에 머문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수은주가 가장 높게 올라간 것은 고작 26도였다. 그런데 반대로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했다. 아침 최저기온은 12~13도까지 내려갔다. 비라도 내리면 체감기온은 더 떨어졌다.

서울의 위도는 북위 37도인데, 헬싱키는 북위 60도가 넘는다. 북극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한여름에도 선선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는 바닷가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선탠을 하거나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헬싱키는 도시 자체가 훌륭한 여름 피서지이자 휴양지여서 유럽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헬싱키의 높은 시민의식

아날로그 감성 살아 숨 쉬는 디자인 수도 Helsinki

핀란드 헬싱키의 명소 룔리 카페에서 여흥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구자홍 기자]

헬싱키의 도시 규모는 서울에 비해 작다. 인구도 65만 명 정도로 서울의 한 자치구 수준에 불과하다. 헬싱키는 크게 세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1지역이 헬싱키 도심, 2지역이 에스포, 3지역이 공항이 있는 반타다. 비유하자면 1지역은 서울 도심, 2지역은 분당 또는 일산, 3지역은 김포라고 할 수 있다.

1지역에서는 대중교통을 한 번 이용하는 데 3.2유로(약 4260원)가 든다. 트램이나 버스 운전기사 등 ‘사람’에게 티켓을 사면 3.2유로를 내야 하지만 정류장에 비치된 ‘기계’에서 구매하면 2.9유로로 10%가량 저렴하다. 인건비가 비싼 선진국다운 가격 정책이었다.

수많은 섬으로 둘러싸인 헬싱키의 대중교통수단은 트램, 버스, 지하철, 그리고 주변 섬을 오가는 배 등 다양했다. 관광객의 이동 편의를 위해 1일권부터 일주일권까지 대중교통수단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판매했다.

대중교통 요금 납부는 ‘무임승차’ 유혹을 느낄 만큼 철저하게 자율적으로 이뤄졌다. 탑승 후 요금인식기에 교통카드를 태그하지 않아도 운전기사가 뭐라 하지 않고, 다른 승객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본인이 알아서 요금을 내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헬싱키 교통당국은 불시 검문 방식으로 ‘양심 불량 승객’을 골라냈다. 트램, 버스, 지하철, 또는 배가 출발하기 직전 검사원이 갑자기 탑승해 승객의 요금 납부 여부를 일일이 확인했다.

아침 출근길에 트램 요금을 내지 않은 사람에게 즉석에서 과태료 80유로(약 10만6400원)를 부과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적발된 사람은 양복을 차려입은 젊은 회사원이었는데,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신분증과 신용카드를 검사원에게 건넸다. 검사원은 서류를 작성하고 신용카드로 과태료를 징수한 뒤 돌려줬다. 신용사회란 시민 스스로 판단해 행동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점을 헬싱키 시민은 체화하고 있는 듯했다.
 


유모차 천국

트램이나 버스를 한 번 타는 데 우리 돈으로 4000원 조금 넘게 드는 헬싱키 대중교통 요금은 꽤 비싼 편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사람은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오히려 유모차 없이 아이와 동반한 엄마는 요금을 내야 한다.

그래서인지 헬싱키 시내 어디에서든 유모차를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교통비 부담 없이 아이와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유모차뿐 아니라 휠체어를 탄 장애인 같은 교통약자도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트램과 버스에는 유모차나 휠체어가 드나들기 편하도록 저상 출입구가 마련됐고, 지하철에도 엘리베이터가 잘 구비돼 있었다.

정해진 철로를 달리는 트램은 물론, 버스도 정류장에 설 때 승강장과 버스 간격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정차했다. 버스운전기사들은 유모차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승객이 손쉽게 탑승할 수 있도록 정차 때부터 배려하고 있었다.



실버 잡지 풍년

아날로그 감성 살아 숨 쉬는 디자인 수도 Helsinki

마리메코 팩토리 아웃렛, 독특한 디자인의 칼레발라 제품들, 스타트업의 요람으로 기능하는 알토대 스타트업 사우나(왼쪽부터).[구자홍 기자]

헬싱키 시내를 그물처럼 오가는 트램은 헬싱키 시민의 발이다. 버스 노선도 잘 구비돼 있었지만 도심을 오가는 데는 버스보다 트램이 유용했다.

매일 트램을 이용하면서 헬싱키 시민 상당수가 책이나 잡지를 펼쳐 들고 있어 놀랐다. 대중교통 이용 시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한국과 비교하면 책을 읽는 헬싱키 시민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헬싱키 시민의 책 사랑은 비키니를 입고 선탠하는 해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리를 깔고 엎드려서 또는 햇볕 아래서 선글라스를 낀 채 책을 읽는 모습은 헬싱키 해변 어디를 가든 마주할 수 있었다.

헬싱키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헬싱키반타공항 서점에서 일하는 한 점원은 “하루 동안 책과 잡지 수십 권이 꾸준히 팔린다”고 말했다. 여성이 남성보다 책과 잡지를 더 많이 구매하고, 나이가 조금 있는 여성 또는 중년 이상 부부를 겨냥한 실버 잡지도 잘 팔린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네 날개를 가진 회전식 잡지매대 두 곳에 60대로 보이는 여성 또는 부부가 표지모델로 등장한 잡지 여러 개가 진열돼 있었다.



‘디자인 퍼스트’ 마리메코와 칼레발라

헬싱키 체류 중 수업의 일환으로 패션기업 마리메코와 귀금속 가공회사 칼레발라 등 기업 두 곳을 방문했다. 또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자유롭게 창업 의욕을 불태울 수 있는 액셀러레이터인 알토대 스타트업 사우나도 찾아갔다.

첫 번째 방문한 기업은 마리메코였다. 마리메코는 우리나라 서울과 대구에 매장을 낸 핀란드의 대표 패션회사다. 눈길을 확 잡아끄는 꽃 모양의 디자인이 특징이다.

마리메코는 제품을 만드는 공장 직원보다 디자인을 연구하는 전문 디자이너가 더 많을 정도로 디자인에 특화된 기업이었다.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문양과 디자인이 마리메코의 핵심 경쟁력인 셈이다. 마리메코 관계자는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더 많이 팔려는 노력 못지않게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고자 디자인 등 연구개발(R&D)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회사를 소개했다.

마리메코 사무실과 공장을 견학하는 동안 커다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작업하는 디자이너를 방방마다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정작 제품을 생산하는 라인에서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 자동화돼 엔지니어 몇 명만이 제품이 디자인대로 생산되고 있는지 검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등이 생산에 투입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창조적인 분야만이 인간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마리메코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금, 은 등 귀금속을 가공해 판매하는 칼레발라의 경쟁력 역시 디자인에 있었다. 칼레발라 관계자는 “스토리가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핀란드 독립에 얽힌 서사시를 제품에 반영해 핀란드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다는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 귀를 쫑긋하게 했다. 회사 이름 자체가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서 따왔다.

‘창의’는 없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잠재적 고객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 구매에 이르도록 하는 비즈니스 영역이라는 것을 마리메코와 칼레발라 두 기업은 잘 보여주고 있었다.

또 헬싱키 외곽 에스포에 위치한 알토대 공대 한켠에서는 스타트업 예비 창업자를 위한 스타트업 사우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은 비즈니스 기획은 물론, 시제품까지 직접 만들어볼 수 있도록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돼 있었다. 창업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가 구비된 스타트업 사우나는 예비 창업자를 길러내는 스타트업 팩토리였다.




입력 2017-08-28 14:31:00

  • 헬싱키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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