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1

2017.01.11

사회

2세까지 악영향, ‘생식독성’의 덫

생식독성 취급 여성 근로자 27% 난임, ‘영업비밀’ 내세우며 쉬쉬하는 기업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입력2017-01-06 17:33:05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가습기살균제 사건 이후 화학제품 독성에 대한 경각심이 어느 정도 높아졌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독성물질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제대로 된 정보와 안전장치 없이 독성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근로자가 상당하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한양대 의과대학 직업환경의학교실을 통해 조사한 ‘생식독성물질 취급 근로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생식독성물질을 취급하는 근로자 대부분이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식독성물질은 생식 기능이나 태아 발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해 물질로, 당사자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까지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야간 교대근무도 생식독성 

    주로 금속 제조업, 전자부품 제조업, 도장 및 기타 피막처리업, 자동차 종합수리업, 플라스틱 합성피혁 제조업, 합성섬유 제조업, 인쇄업 종사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방사선 취급 노동자와 세척제를 사용하는 청소 노동자도 생식독성 위험 인자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생식독성은 화학 혹은 방사성 물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야간 교대근무나 장시간 서서 일하는 경우, 무거운 짐을 장시간 운반하는 경우도 생식독성 유해인자로 구분된다.

    이번 조사는 조선소와 병원 근로자 53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는데 조선소 근로자의 경우 톨루엔, 납, 에톡시에탄올, 에톡시에틸아세테이트, 수은, 일산화탄소, 카드뮴 등의 노출이 심각하고 보건의료업 종사자는 톨루엔, 와파린, 항생제 분진, 전리방사선, 면역억제제 분진, 항암제 분진 등에 쉽게 노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보건의료업에 종사하는 여성 근로자 406명 중 27%가 난임을 겪고 있고, 22.8%는 조산·사산·자연유산 경험이 있으며, 20.2%는 월경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선천성기형 자녀를 출산한 근로자는 3.8%에 달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생식독성이 무엇인지, 건강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사 대상자 중 ‘생식독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26.6%에 불과했고, 직장에서 생식독성 관련 안전보건 자료나 정보를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도 30%를 밑돌았다.  

    국내 유명 반도체 회사에서 7년째 근무 하는 여성 근로자 김모 씨는 “회사 동료 가운데 생리통이 유난히 심한 사람이 꽤 된다. 매달 생리 기간만 되면 기숙사 침대에 거의 쓰러져 있다시피 한 경우도 있다. 여기에 야간 교대근무까지 하면 더 심해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취급하는 물질과 야간 근무가 생식독성이란 생각은 못 하고, 단순히 잠을 잘 못 자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근무 시 사용하는 화학물질 중 어떤 것이 독성을 지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생식독성 유해인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검진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수 기업은 ‘영업비밀’을 이유로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생식독성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근로자는 생식독성 피해를 예방하기 힘들 뿐 아니라 사후 피해가 발생해도 이를 입증하기 어려워 2차 피해를 입고 있다.  

    조기홍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업안전보건실장은 기업의 영업비밀 남발을 방지하고 MSDS의 신뢰성을 확보하려면 ‘영업비밀 심사제도’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 실장은 “생식독성 등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은 MSDS에 게시토록 의무화하고 이를 해당 노동자에게 교육시키게 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은 대부분 근로자에게 생산성 향상을 위한 안전교육만 실시할 뿐, 근로자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선진국에서는 더는 사용하지 않는 독성물질을 여전히 쓰는 경우도 있다. 기형아 출산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에틸렌글리콜 에테르’가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 반도체 사업장에서 퇴출됐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대표적인 휘발성 유기용제로 사용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특별관리 물질도, 생식독성 1급 물질도 아니다.



    피해 입증은 정부와 기업이 책임져야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생식독성으로 규정한 화학물질은 45종밖에 되지 않는다. 유럽 184종, 미국 112종, 프랑스 108종, 캐나다 88종에 비하면 현저히 적다. 이권섭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화학물질정보연구부장은 “심지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물질이 규제물질로 올라간 경우도 있다. 규제 대상인 생식독성물질 수를 늘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근로현장에서 주로 사용하는 생식독성물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또한 정부와 사업주가 나서 생식독성물질의 대체물질을 개발하고, 이미 개발된 대체물질이 있으면 즉각 해당 물질을 사용하도록 법적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재해보상 관련 규정도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현재 생식독성 질환 중 유산, 불임은 그나마 업무상 질병에 종종 해당되지만, 자녀가 선천적 이유로 병에 걸렸을 때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아내가 아닌 남편의 업무환경에 따른 질환은 피해를 인정받기 더 어렵다. 이권섭 부장은 “생식독성 질환에 대한 의학적 연구 자체가 매우 부족해 그 연관성을 입증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상 질병에 대한 입증 책임을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생식독성 정보는 사업주가 알고 있는 만큼 사업주에게 입증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고 밝혔다.  

    또한 생식독성 피해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생식독성 피해자 중에는 자신의 질병으로 주변인들에게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경우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권섭 부장은 “아직까지도 생식독성을 일부 여성 근로자의 한정된 문제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산업재해로, 이들이 자신은 물론 2세의 건강을 지킬 수 있게끔 공론화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