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9

2018.07.31

손석한의 세상 관심법

“우리는 왜 극단적 이분법 사고에 빠진 걸까”

추모 vs 조롱  …  노회찬 죽음 통해 본 대한민국 사회

  • 입력2018-07-31 11: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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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7월 23일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드루킹’ 김동원(49·구속기소) 씨 일당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수사 받던 진보 정치인의 자살은 큰 파장을 낳았다. 자살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행동으로,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리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자살을 ‘인간의 자유로운 마지막 선택’이라고 보기도 했다. 반면, 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독교에서는 이를 죄악으로 본다. 자살 원인은 여러 가지다. 심각한 우울증, 어려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 심리, 관련자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복수심의 발로, 자신의 심적 고통을 해결하는 마지막 수단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신으로 향하는 공격성의 결과’로 이해한다. 이외에 가능한 정신의학적 설명으로는 △보복적 차원에서 포기 △힘과 통제(또는 지배)를 획득하는 수단 △죽은 사람과의 재결합 소망 △자기 징벌의 의미 △재생으로서 죽음 △집단적 압력에 굴복 등이 있다.

    로빈 후드는 의적인가, 도둑인가

    노 의원이 남긴 유서 내용을 보면, 불법정치자금 수수는 인정하되 대가를 약속한 뇌물 성격의 돈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이 몸담은 정당이나 이념 집단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해 진보 진영의 정치적 타격을 최소화하고,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을 스스로 속죄하려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그의 사후에 벌어지고 있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수많은 행렬의 조문객이 있는 반면, 그의 죽음을 조롱하고 심지어 기뻐하는 태도를 보이는 일부 집단과 여성단체의 행태가 그것이다. 놀랍고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죽음 앞에 숙연해지고 애도를 표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이념적으로 반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죽음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왠지 모를 미안함이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 역시 보편적 인간의 성정(性情)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축하하거나 조롱하는 분위기가 버젓이 펼쳐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분법적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흑백논리로 설명되는 이분법적 사고는 ‘옳거나 그름’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어떤 생각이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지, 혹은 현실적으로 타당한지를 따진다. 그래서 찬반 투표를 하거나 ‘OX’ 답변으로 판단한다. 이때 모든 사람이 이의 없이 한쪽으로 쏠리면 그것은 상식이 되지만, 6 대 4나 7 대 3 비율로 한쪽이 득세하면 대세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이 잘못인가’라는 질문에 10명 모두 ‘그렇다’고 답하면 그것은 보편타당한 가치관이요, 의견일치를 보인 도덕적 명제가 된다. 그러나 ‘평소 피해를 당한 사람이 피해를 주는 사람을 때리는 것은 잘못인가’라는 질문에 10명 중 6명이 ‘아니다’라고 답하면 그것은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대세적 대답이 될 수 있다. 물론 10명 중 4명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나 특정 집단의 성질도 존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옳다’와 ‘옳지 않다’고 구별되는 판단은 우리 인간이 유아기 때부터 익혀나가는 발달적 성장 과제다. 만 6세 어린이에게 “로빈 후드는 부자들로부터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말한다면 그 어린이는 “로빈 후드는 나쁜 사람이에요. 도둑이니까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동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 행동은 나쁘다는 점을 한창 배우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도덕적 관념은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기 초반에 이르면 흐트러지게 된다. 동기가 중요해지고,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다양한 관점의 논리와 연역법적 사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은 “로빈 후드는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귀족을 벌하고, 농민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고자 의적(義賊)의 길을 택한 거예요. 따라서 그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아야 해요”라고 대답한다. 이때부터 우리의 삶은 복잡다단해지고, 과연 무엇이 옳은지, 혹은 타당한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현실적, 개인적 득실 관계에 따라 자연스레 삶의 태도와 방향을 정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좀 더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경계하고 혐오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이러한 변화를 무척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인생의 깨달음이라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곤 한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가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로 발전하다가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로 퇴화하는 것이다.

    이해득실, 감성 판단으로 편 가르기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내 편이냐, 아니냐에 따른 극단적 이분법적 사고로 전환이다. 즉 자신의 이해득실이라는 현실적인 판단 외에 자기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의 감성적 판단이 가미돼 편 가르기 사고에 빠져드는 경우가 생긴다. 이는 무척 위험하고 잔인한 현상이다. 편 가르기의 가장 극단적 형태는 전쟁이다.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죽느냐 죽이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전시에는 적군 수십 명의 목을 베는 사람은 살인자가 아니라 위대한 영웅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 전시 상태인가. 한쪽 진영에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업적을 기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허물을 질타하니 비상식적, 비정상적 사회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남성과 여성, 노년층과 청년층, 부자와 빈자 등 이분법적 대결 구도를 빨리 타파해야 한다. 이기는 쪽이 지는 쪽을 감싸 안으며 함께 나아가자고 설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완전한 승리나 정복하려는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 상대방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진보세력이 보수세력을 모두 몰살한다고 이상적인 사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핍박받던 여성이 남성을 모두 제거한다면 인류는 멸망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들이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면서 인간 본성인 공격성을 극도로 발휘할 때 막말이 쏟아지고 극단적 행동이 나온다. 극단적 언행이 횡행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밀리고 있는 사람들이 극단적 언행을 보이면서 사회적 반향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또다시 우월한 세력의 더욱 강력한 반격을 불러와 대결구도가 지속되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며 매우 창조적이다. 그렇게 창조적으로 상상된 내용은 말과 글에 의해 언어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말과 글이 쌓여가면 언젠가 현실세계에서 행동으로 이뤄질 수 있다. ‘저 미운 사람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상상을 말과 글로 표현하다 어느 순간 누군가에 의해 실행된다면, 우리는 끔찍하고 무서운 사회의 도래를 목격할 것이다. 그러니 자제해야 한다. 내 편 네 편의 이분법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이분법적 사고로 전환하고, 더 나아가 다(多)분법적 사고로 내 의식과 마음을 확장해 융통성과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사이좋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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