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3

2017.11.15

손석한의 세상 관심법

“피의자 현실 잘 아는 법조인, 고통 미리 예상해 극단적 선택”

국정원 ‘댓글 수사’ 관련자의 잇단 자살

  • 입력2017-11-14 10: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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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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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 시절 이른바 ‘국가정보원(국정원) 댓글’ 수사를 방해한 혐의를 받던 변창훈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11월 6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4층 화장실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앞서 일주일 전에는 고인과 함께 수사선상에 올랐던 국정원 소속 정모 변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기도 했다. 

    국정원 댓글 수사 과정에서 이처럼 관련 인물이 2명이나 자살을 선택한 것은 매우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은 국정원의 치부를 감추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적폐청산’을 내세운 현 정권의 틀에 맞춘 ‘하명(下命)수사’ 때문이라는 분석도 한다. 어쨌든 두 사람은 본격적인 수사를 앞두고 심리적 압박감 내지 억울함에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개연성이 높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법조인으로, 그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스스로를 죽음이라는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돌이켜보면 그동안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 정치인이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자살한 경우가 종종 있다. 자살을 감행한 것과 관련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으면 죽음을 선택했을까’ ‘엄청난 파장이 예상돼 죽음으로써 덮으려고 했나 보다’ ‘법의 심판을 떳떳하게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자살은 비겁하다’는 식의 해석들이다.


    우울증, 현실 도피 심리, 복수심

    고인들을 생각하면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필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자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일반적으로 자살 하면 가장 먼저 우울증을 떠올린다. 갑작스레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고, 만성적으로 심각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살하기도 한다. 

    또한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 심리’가 있다. 아무리 살아보려 발버둥 쳐도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자살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 관련자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복수심의 발로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재개발지역 주민이 빠른 보상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 경우 자신의 죽음으로 토지 보상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충격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는 복수의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부모와 사이가 극도로 나쁜 청소년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무모한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 경우 부모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여생을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자신의 심적 고통을 해결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살아있을 때 벌어질 끔찍한 상황을 예상하면서 ‘차라리 죽자’고 결심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합리화이면서,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다. 동시에 엄청난 수치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탓이다. 예컨대 앞서 검사들은 늘 타인을 수사하고 구형을 했는데, 이제 처지가 뒤바뀌어 피의자 신분이 되는 것 자체를 수용하기 어려웠을 테다. 수술 실력이 뛰어난 외과의사가 어느 순간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됐을 때 많은 심리적 충격과 좌절을 경험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용맹한 장수는 적의 포로가 되기 직전 자결하곤 했는데, 이 또한 장수의 신분에서 노비로 추락하는 수모를 피하려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검사, 의사, 장수는 각각 피의자, 환자, 노비의 고통을 바로 옆에서 관찰했기에 누구보다 그들의 현실을 잘 알고,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힘든 마음 상태에 공감해왔다. 그래서 자신이 그들처럼 된다는 생각만 해도 엄청난 공포를 먼저 느낀다. 현실 또는 삶의 포기라는 극단적 대안이나 해법을 찾는 것이다. 

    자살을 선택한 고인들의 처지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도 자살은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신체적 통증과 일상의 고통을 느끼면서 중병이나 난치병과 싸우는 수많은 환자와 그 가족이 있다. 지독한 가난이나 만성장애 탓에 사회적으로 위축돼 있고 불행감에 휩싸인 채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가족 간 갈등이나 불화로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또한 직장이나 지역사회에서 유언비어와 다른 사람들의 비난으로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 사람도 꽤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자살하지는 않는다. 비록 사는 게 힘들어 자살을 한두 번 생각해봤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그 전에 자살이라는 생각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스스로 경계한다.


    우울증이 똬리를 틀면…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산다’거나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 죽음으로써 그 말을 증명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자신의 괴로운 감정을 배설하고 고통을 처리한다. 즉 살면서 누구나 다 크고 작은 심신의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것을 자살로 해결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간의 행동이다. 설령 자살 충동이 들더라도 옆에 있는 가족과 인생의 가치, 자살을 용납하지 않는 인식,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제어 장치’가 작동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자살을 선택할까. 대부분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즉 신체적 질병이나 불같은 성격 외에 ‘우울증’이 어느 틈에 자라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자살은 우울증 등 질병에서 비롯된 인간의 이상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매사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또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의 뇌는 정신적 즐거움과 평온함을 담당하는 신경전달물질이 고갈돼 우울, 불안, 의욕 저하, 흥미 감소, 절망감 등 부정적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감정 상태는 온전한 생각과 합리적인 판단을 손상시킨다. 그래서 현재에 부정적이 되고 미래의 삶도 불안해져 자살을 시도한다. 실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을 사후에 분석해보니 우울증을 앓은 사람이 많았다. 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우울한 심리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 갑작스레 전개된 상황 탓에 우울한 상태에 잠시 빠진 것인데, 이는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곤 한다. 

    따라서 자살 충동을 느낀 사람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 ‘요즘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라는 식으로 무관심하거나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특히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같은 유명인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경우 자살 충동이 생기면 더욱 위험하다. 주변에 알려질까 봐 두려워 쉬쉬하다 보니 전문의에게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한다. 이 경우 가족, 친구 같은 ‘지지체계(support system)’가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지지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아예 없다면 우울증과 자살의 위험성이 증대된다. 특히 혼자 지내는 사람은 지지체계가 미약할 수 있어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주변에 자살을 암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치료받도록 하는 게 비극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자살 충동은 고쳐야 할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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