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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3·1운동 100주년

“세계의 악인, 일본에 조치를 취해달라”

3·1운동 이후 미주 한인 단결해 독립운동 …  美 대통령에 청원, 무력항쟁 준비 등 활동

“세계의 악인, 일본에 조치를 취해달라”

1911년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의 한인들. 190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 지역 한인 노동자로 정착한 이래 많은 한인이 리버사이드로 모여들었다. [사진 제공 ·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1911년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의 한인들. 190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 지역 한인 노동자로 정착한 이래 많은 한인이 리버사이드로 모여들었다. [사진 제공 ·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3·1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특히 미주 한인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미주 한인들은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과 인종차별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3·1운동 소식은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3·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이승만, 안창호 등 미주 한인 출신이 주요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서 미주 한인들의 역할은 중국· 러시아 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돼왔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장 이종관 이름으로 발행된 제1차 의연금 증서. 3·1운동 이후 하와이에서만 6만 달러의 독립의연금이 모금된 것으로 알려진다. [동아DB]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장 이종관 이름으로 발행된 제1차 의연금 증서. 3·1운동 이후 하와이에서만 6만 달러의 독립의연금이 모금된 것으로 알려진다. [동아DB]

미주 한인들은 3·1운동 직후 본격적인 모금 활동을 전개해 하와이에서 6만 달러, 본토에서 9만 달러 등 총 15만 달러의 기금을 모금했다. 그중 3만 달러를 상해임시정부 운영 기금으로 보냈으며, 나머지 12만 달러는 각종 독립운동 활동 후원금으로 썼다.


3·1운동 계기로 ‘단합’

또 미국 언론과 정계를 대상으로 활발한 여론 환기 활동도 펼쳤다. 특히 서재필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를 주도하고,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활동을 전개했다. 분열과 갈등이 심했던 하와이 한인 사회도 3·1운동 소식을 접한 후 단합된 모습으로 거의 매일 집회를 열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3·1운동 이후 미주 사회가 빠르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배경에는 1913년 벌어진 ‘헤멧밸리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미주 한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비공식적이지만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법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① “일본 정부가 헤멧밸리 사건에 개입할 근거 없다”
1913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에 거주하는 한인 11명이 헤멧(Hemet)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살구 농장으로 일을 하러 갔다. 하지만 백인들이 그들을 일본인으로 오인해 쫓아냈다. ‘신한민보’(미주 한인사회 민족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에 따르면 당시 백인들은 한인을 일본인으로 오해해서가 아니라, 당시 캘리포니아에 팽배했던 아시아 배척 운동 때문에 쫓아낸 것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영사는 미주 한인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도움의 손길을 가장해 접근한다. 일본 정부는 “미국 거주 한인들은 일본 식민국민”이라며 “피해를 본 한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미국 정부에 공식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 조짐이 생기자 대한인국민회는 미 국무장관이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에게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 식민국민이 아니며 한국인’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일본과 외교 마찰을 고민하던 브라이언 장관은 한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 식민국민이 아니다”라며 “일본 정부가 헤멧밸리 사건에 개입할 근거가 없다”면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또한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정했다. 

이는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영국과 혈맹관계이던 미국 정부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도인들을 ‘테러리스트’ ‘혁명주의자’로 낙인찍고 체포·구금하거나 추방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② 무력항쟁 당위성 확신…윌로스 비행학교·비행대 창설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학생들이 1920년 태극기가 선명한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행학교는 1921년 재정적 문제로 문을 닫았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학생들이 1920년 태극기가 선명한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행학교는 1921년 재정적 문제로 문을 닫았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레드우드 비행학교 한인 학생들이 노백린 장군과 함께 1920년 2월 5일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장병훈, 오임하, 이용선,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레드우드 비행학교 한인 학생들이 노백린 장군과 함께 1920년 2월 5일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장병훈, 오임하, 이용선, 노백린, 이초, 이용근, 한장호.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3·1운동을 계기로 미주 한인들은 독립전쟁론, 즉 무력항쟁을 준비한다. 1900년대 초반부터 박용만을 중심으로 소년병 학교와 군단이 조직되긴 했으나 3·1운동 이후 좀 더 본격화됐다. 3·1운동 직후 청년혈성단이 만들어졌고, 곧이어 윌로스 비행학교·비행대를 설립해 공군 파일럿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윌로스 비행학교·비행대는 1920년 3월 북부 캘리포니아 윌로스(Willows)에 설립됐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군무총장 노백린,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 임시정부 주요 각료 3명이 창설과 운영에 기여했다. 이는 윌로스 비행학교·비행대가 민간 조직이 아닌, 임시정부의 공식 군사 조직임을 보여준다. 윌로스 비행학교·비행대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 50명 중 3명이 조선군 출신이며 4명이 미군 출신, 그리고 1명이 영국군 출신이다. 또한 90%가 대한인국민회 소속이고, 38%가 흥사단원이었다. 그리고 이들 전원이 한인 해외동포였다.


③ 미주 한인 여성들, 미 대통령에게 “세계의 악인에 조치 취할 것” 요구
1919년 미국 하와이에 거주한 한인 부녀자들. [동아DB]

1919년 미국 하와이에 거주한 한인 부녀자들. [동아DB]

3  ·  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부터 미주 각 지역에서는 부인애국단이 결성됐다. 사진은 캘리포니아 중부 디누바의 대한여자애국단 창단 기념사진. [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3  ·  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부터 미주 각 지역에서는 부인애국단이 결성됐다. 사진은 캘리포니아 중부 디누바의 대한여자애국단 창단 기념사진. [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홈페이지]

대한인국민회의 북미 총회장 이대위는 1918년 1월 21일 여성 동포들의 대한인국민회 입회를 허락하는 훈시를 발표한다. 이후 각 지방회에서 여성 동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지방회를 시작으로 미주에서는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중부의 디누바(Dinuba)와 리들리(Reedley) 등에서 여성회가 조직됐다. 


리버사이드농장의 안창호. [동아DB]

리버사이드농장의 안창호. [동아DB]

3·1운동 직후 미주 한인 여성들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부인애국단’을 발기한다. ‘신한민보’는 각 지방 부인회가 대한인국민회 관할 아래 통합돼 활동하기 바라며 일치된 이름을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안창호가 제시한 부인애국단으로 하거나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부인회에서 직접 다른 이름을 지으라고 권했다. 각 지역마다 부인애국단의 이름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추구했다. 

부인애국단은 외교 활동도 벌였다. ‘신한민보’ 1919년 7월 12일자에 실린 ‘대한 부인애국단은 대통령에게 청원’에 따르면 부인애국단은 미국 대통령에게 세계 리더에 걸맞게 ‘세계의 악인’인 일본에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청원은 부인애국단 단장 양제현과 서기 김석은의 이름으로 작성됐다.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왜적의 장을 먹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김자혜, 리신환, 량제현은 고추장과 간장을 만들어 팔았다. 리버사이드 지역의 한인 여성들도 집에서 간장을 만들어 일본 간장 불매운동에 동참했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한다.


④ 3·1운동 소식, 미국에서 ‘오클랜드 트리뷴’이 첫 보도
3·1운동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미국 신문은 ‘오클랜드 트리뷴’이었다. 1919년 3월 10일자에 ‘한국이 세계에 독립을 요구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사진 제공 ·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3·1운동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미국 신문은 ‘오클랜드 트리뷴’이었다. 1919년 3월 10일자에 ‘한국이 세계에 독립을 요구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사진 제공 ·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3·1운동 소식은 일본 정부가 정보를 통제한 탓에 미주 한인 사회에는 중국을 통해 약 열흘 후 알려졌다. 그동안 제일 먼저 3·1운동 소식을 전한 미국 신문은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로 알려져왔으나, 확인 결과 ‘오클랜드 트리뷴’이 더 앞선다. ‘오클랜드 트리뷴’은 1919년 3월 10일자 ‘한국이 세계에 독립을 요구하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지난 3월 1일 오후 1시 한국은 독립을 선언했다. 한국인들은 오래 준비를 해왔고, 3월 1일 선언을 했다. 일본 정부가 모든 통신을 통제했기 때문에 한국 독립선언 소식을 늦게 전달받았다. 이 소식도 도쿄가 아닌 상하이에서 받았다. 전보는 대한인국민회 안창호 앞으로 보내졌는데, 3000만의 한국인, 300의 교회, 5000의 천도교, 대학, 학교, 그리고 모든 조직이 3월 1일 서울과 평양, 그리고 다른 도시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3월 13일 상하이발로 보도했으며 ‘워싱턴포스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샌버너디노 카운티 선’ 등이 뒤를 이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4월 3일자에서 3·1운동 후속 보도를 했다. ‘한국 봉기 평화적’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3·1운동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이 기사의 소제목은 ‘일본의 탄압과 체포에 저항하지 말라’.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육성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4월 4일자에 ‘일본이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 체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보도했다. 일본이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하던 모펏 박사, 길리스 목사, 모리 목사 집을 수색했고 조선인들에게 자신의 집에서 유인물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한 모리 목사를 구금했다는 내용이었다. 

‘샌버너디노 카운티 선’은 1919년 3월 17일자에 대한인국민회가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이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지를 국제연맹이 결정하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3월 30일자에 ‘여성과 아이들이 창에 찔리다’라는 섬뜩한 제목으로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다. 이 기사는 ‘대한인국민회 대표자인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한국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고 알려왔다’고 보도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과 교회 지도자들, 천도교, 불교, 유교, 학생, 상인 모두 일어섰다. 한국 전국은 계엄령 하에 있고 일본 군인은 민간인을 향해 총을 쐈다. 1만1000명이 체포됐고, 많은 사람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3·1운동 소식을 접한 미주 한인 사회는 이처럼 대립과 분열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로 뭉쳤다. 대한인국민회가 주간으로 내던 ‘신한민보’는 이틀마다 발간하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활발하게 벌어진 독립의연금 모금 활동, 무장 독립운동, 독립 당위성을 알리는 여론 활동, 미주 한인 여성들의 적극적 활동 등이 펼쳐졌다.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은 한인 출신 미군 ‘유진 초이’였는데, 그 유진 초이의 후손들이 미주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주간동아 2019.02.15 1176호 (p24~27)

  •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 edward.chang@ucr.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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