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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낭만’이란 번역어는 1907년 일본에서 처음 등장

낭만에 대하여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 (이병헌 분)와 고애신 (김태리 분)이 복면했을 때 얼굴을 서로 확인하는 장면(오른쪽)과 그 시대적 배경을 ‘낭만의 시대’로 규정한 포스터. [사진 제공·CJ ENM]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 (이병헌 분)와 고애신 (김태리 분)이 복면했을 때 얼굴을 서로 확인하는 장면(오른쪽)과 그 시대적 배경을 ‘낭만의 시대’로 규정한 포스터. [사진 제공·CJ ENM]

“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고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박래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태양의 후예’와 ‘도깨비’의 작가 김은숙의 신작으로 7월 7일부터 방영되기 시작한 케이블TV방송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이 한 대사다. 고애신은 한양 명문대가의 귀한 여식으로 한양사람들이 흠모하는 ‘만인의 애기씨’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고자 남몰래 총포술을 익혀 밤에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저격수로 변신한다. 그런 그가 종놈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미국으로 밀항해 미군 장교가 된 뒤 주한 미국공사관에 파견된 유진 초이(이병헌 분)를 만난다. 어둠 속 복면을 한 채 같은 표적을 노리는 저격수로 만난 둘은 서로의 정체를 탐색하며 서서히 연정을 품게 된다. 

그런데 영어단어 ‘러브’의 뜻을 몰라 미국 국적의 초이에게 “러브라는 게 무엇이오”라고 묻는 양갓집 규수가 불쑥 낭만에 대한 자신만의 남다른 감수성을 털어놓는다. 낭만이란 단어의 개념을 잘 아는 현대 한국인에겐 참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고애신과 유진 초이가 살던 시대엔 우리가 아는 ‘낭만(浪漫)’이란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로맨티시즘 번역에서 탄생

낭만은 영어 Romanticism의 번역어로, 낭만주의에서 파생된 단어다. 일본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인 나쓰메 소세키(1867~1916)가 1907년 ‘문학론’에서 낭만주의라는 장르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전에도 그것에 해당하는 가타가나 외래어 표기는 존재했지만 이를 일본어 발음이 같은 한자어 ‘浪漫’으로 표기한 것은 나쓰메가 최초라는 설명이다. 로맨스를 로망스(浪漫斯)로 번역한 것 역시 나쓰메였다. 그가 1907년 발표한 ‘태풍(野分)’이란 작품에도 로맨틱하다는 뜻으로 낭만적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물결 랑(浪)’과 ‘질펀할 만(漫)’이 결합한 낭만이란 한자어는 그 전에도 물론 존재했다. 하지만 ‘정처 없이 떠돈다’거나 ‘방탕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보면 광해군일기에만 딱 2번 등장하는데 ‘(국경지대를) 할 일 없이 떠돈다’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꿈과 감정에 충실한 태도’를 일컫는 ‘낭만’의 뜻이 한국에서 확립된 것은 빨라야 1910년대로 봐야 한다. 실제 1920년 창간된 ‘동아일보’ 기사에서 낭만이란 단어를 검색해보면 1920년대 내내 낭만주의 문예사조로만 등장한다. 그러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주의를 뗀 낭만이란 단어가 언급되기 시작한다.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적 배경은 1898년 미서전쟁(미국-스페인전쟁)이 끝나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다. 특히 고애신과 유진 초이가 저격수로 만난 날 진고개(충무로)에 수백 개의 전등이 동시에 들어온 이벤트가 벌어졌으니 1901년이다. 일본에서 낭만이란 번역어가 처음 등장하기 6년 전이요, 조선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 부르던 ‘모던 뽀이’와 ‘모던 걸’이 등장하기 20여 년 전이다. 1900년 무렵의 조선인이라면 ‘낭만’이란 말 대신 아마도 ‘풍류’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낭만의 정확한 어원은 로망(Roman)이다. 로망어는 고대 로마제국의 표준어인 라틴어와 다른 방언을 뜻했는데, 중세가 되면서 지역별 토착어를 일컫는 용어로 굳어졌다. 당시 음유시인들이 로망어로 노래한 내용은 그 지역의 역사와 전설, 영웅의 모험담 아니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였다. 여기서 ‘12~13세기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통속소설’을 뜻하는 로맨스(romance)라는 단어가 생겼고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 또는 연애 사건’이라는 뜻이 파생된 것이다. 

그러다 18세기 후반 낭만주의라는 사조가 대두된 것은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이성과 객관, 보편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이를 문화예술에 적용한 고전주의에 맞서 인간의 감정과 욕망, 꿈을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체험과 주관을 중시한 것이다. 또한 18세기 시작된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 도시에 맞서 전원을 이상화하고 제국에 맞서 주변으로서 민족을 찬양하며 보편이성보다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했다. 그러다 냉철한 현실인식을 강조하는 사실주의가 등장하면서 예술사조로선 퇴조를 맞지만 정치사상으로선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하게 된다. 

이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1900년 전후 조선을 지배한 사조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계몽주의였다. 밀려오는 외세로 풍전등화 신세가 된 나라를 구하고자 선각자들이 개화와 각성을 부르짖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 이후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싹트기 시작한다.


낭만 vs 로망

일본에서도 사상의 자유가 풍미해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불리던 시대 조선에 상륙한 낭만은 자아실현과 자유연애를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태도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단어로 각인됐다. 당시 조선에서도 문예사조로서 낭만주의는 사실주의에 비견되며 퇴조하지만 ‘주의’를 뺀 ‘낭만’이 각광받게 된 데는 민족주의와 공명이 한몫을 했다. 제국주의 일본이란 표준과 중심, 현실에 대한 저항적 태도를 함축했기 때문이다. 

실제 현대 일본에서는 낭만적이란 한자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로만칫쿠(ロマンチック)’란 가타가나 표현을 더 선호한다. 그런 일본으로부터 뒤늦게 수입된 단어가 있다. ‘로만(ロマン)’이란 단어다. 요즘 한국에서 ‘남자들의 로망’이니 ‘오래된 로망’으로 쓰이는 이 단어에는 ‘꿈이나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낭만과 관련된 서양 언어에는 없는 의미로, 오직 일본어에서만 파생된 것이다. 실제 일본어사전에서 로만(ロマン)이란 표제어를 찾아보면 ‘일본어의 독자용법’이란 설명과 함께 ‘꿈이나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란 뜻풀이가 나온다. 

이 로만은 낭만과 뿌리는 같지만 ‘왜색’이 짙은 단어다. 한국에서 이 말이 유행한 시점은 ‘로망 포르노’라는 일본의 성인에로영화 장르가 한국에 정식으로 보급된 2000년대 중반 이후다. 197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풍미한 로망 포르노에는 남성들에게 공상으로만 가능했던 성적 판타지를 실현시켜준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한국의 ‘낭만’이 일본의 ‘로망’보다 훨씬 더 낭만적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수많은 명대사를 유행시켜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김은숙 작가의 사극 도전은 전작 ‘도깨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도깨비’가 불특정한 고려시대와 현재를 넘나든 퓨전사극이었다면, ‘미스터 션샤인’은 구한말을 다루며 흥선대원군과 고종 같은 실존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정통사극에 가깝다. 드라마의 미덕이 리얼리즘에 있다면 사극의 미덕은 충실한 고증에 있다. 언어의 마술사라면 마땅히 언어에 대한 고증부터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2015)에서도 “너는 참 낭만적”이라는 대사가 등장하니 김 작가만 탓할 일은 아닌 듯하지만.




주간동아 2018.07.25 1148호 (p6~7)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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