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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 됐을까

T. S. 엘리엇이 사랑했던 프랑스 남성 장 베르드날이 전사한 달

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 됐을까

T. S. 엘리엇(왼쪽)과 장 베르드날. [출처 · tseliot.com]

T. S. 엘리엇(왼쪽)과 장 베르드날. [출처 · tseliot.com]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4월만 되면 인구에 회자되는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888~1965)의 장시 ‘황무지’의 첫 구절이다. 이 중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제주 4·3사건, 4·19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 유독 4월에 수많은 생령의 상실을 경험한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클리셰가 되다시피 했다. 

그럼 원작에서 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일까. 전통적 해석은 이렇다. 433행이나 되는 ‘황무지’는 종교적 신앙을 잃고(不信), 생식의 기쁨을 잃고(不毛), 썩어서 사라지길 거부해 재생도 불가능한(不活) 서구문명의 비극성을 노래한다. 봄은 생식과 부활(復活)의 계절이다. 하지만 진정한 생식과 재생이 불가능한 서구인에게 봄은 그 불가능성을 환기케 하기에 잔인하다. 또 공허한 추억과 덧없는 욕망을 일깨워 치명적 상처만 덧나게 하기에 더 잔인하다.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고문을 가하기에 가장 잔인하다. 

그렇다면 왜 3월이나 5월이 아닌 4월일까. 1922년 발표된 ‘황무지’는 기독교의 성경과 어부왕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고대 인도의 철학서 ‘우파니샤드’,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희곡, 보들레르의 시 등 다양한 텍스트를 빌려다 중의적 비유의 진수를 펼친다. 낭만주의의 주정주의에 맞서 주지주의를 주장한 모더니즘의 시대를 선포한 시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4월도 영문학의 시조로 불리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이 성지순례를 떠나는 시점을 따온 것으로 풀이된다. 엘리엇이 오랜 방황 끝에 영국 국교도로 개종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미국 시카고대 영문학 교수 제임스 밀러는 1969년 발표한 ‘T. S. 엘리엇의 개인적 황무지’라는 책에서 그 숨겨진 이유를 밝혔다. 밀러 교수는 엘리엇에 대한 전기적 연구를 통해 그가 1910년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난 장 베르드날이란 의대생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음을 찾아냈다. 

엘리엇보다 두 살 연하인 베르드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1915년 4월 발발한 갈리폴리 해전에서 전사했다. 충격을 받은 엘리엇은 그해 발레리나 출신인 비비언 헤이우드와 쫓기듯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불행으로 치달았고, 1921년 부부관계를 회복하고자 스위스 로잔 호숫가에서 요양 중일 때 ‘황무지’를 집필했다. 

엘리엇은 1934년 ‘늦은 오후 라일락 가지를 흔들며 룩셈부르크 공원을 가로질러 오던 한 친구가 있었네, 훗날 갈리폴리의 진흙에 섞여 들어간 한 친구가 있었네’라는 글을 남겼다. 4월이 왜 가장 잔인한 달인지, 라일락이 왜 추억과 욕망의 꽃인지가 설명된다. 게다가 ‘황무지’에는 페니키아의 전설적 뱃사람 플레바스와 익사에 대한 묘사가 여럿 등장한다. 5장으로 이뤄진 ‘황무지’ 4장은 제목부터가 ‘수사(水死·Death by Water)’다. 그 마지막 구절이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이다. 

밀러 교수는 이를 토대로 ‘황무지’를 지배하는 상실감이 서구문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베르드날을 잃은 개인적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엇 자신이 “황무지는 시대에 대한 비판의 산물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시”라고 밝힌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1981년 발표된 뮤지컬 ‘캣츠’의 유명 삽입곡 ‘메모리’도 베르드날에게 헌정한 엘리엇의 첫 시집 ‘프루프록과 그 외의 관찰’(1917)에 수록된 시들을 차용해 작사된 것이다. 

엘리엇은 개인적 감정을 반영하되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을 시작(詩作)의 출발로 봤다. 따라서 ‘황무지’는 엘리엇의 개인적 상실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이 겪은 상실감과 결부해 확장된 문학작품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간동아 2018.04.04 1132호 (p8~8)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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