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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 김형오 전 국회의장 주제강연

“대한민국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제 7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 ‘한국 정치, 나라를 지킬 수 있나’

“대한민국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동아일보]

[동아일보]

“제왕적 대통령으로 출발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는 지금의 헌법을 바꾸지 않고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보복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 분산만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사진)은 1월 23일 열린 제7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한국 정치, 나라를 지킬 수 있나’ 주제강연에서 국민 화합과 정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개최한 이번 강연에서 김 전 의장은 “영원한 나라는 없기에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다음은 주제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정치가 국가를 지키는 것은 상식

“영국 식민지로부터 미국이 독립하는 것은 ‘상식’이다.” 

미국 독립의 선각자 토머스 페인이 1776년 출간한 ‘상식(Common Sense)’은 그 반년 뒤인 7월 4일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문에 반영됐다. 작은 책 한 권이 혁명의 사상적 밑불 구실을 한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사건을 다룬 본인의 졸저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나라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 새로 등장한 나라가 100여 개국에 이른다. 남북한도 여기에 들어간다. 반면 이 기간 지도상에서 사라진 나라도 수십 개국이다. 대한민국도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머지않은 과거에 나라를 잃었던 경험도 있다. 

스무 살 청년 김구는 명운이 다해가는 나라를 보며 고민이 깊었다. 1895년 어느 날 일생의 스승 고능선으로부터 “이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망해도 더럽게 망한다”는 말을 듣고부터다.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할 수는 없나. 적어도 신성하게 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토머스 페인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 정치가 대한민국을 망하지 않게 하고 국가를 지켜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요즘 이 상식이 더는 상식이 아닐 수 있다는 염려와 불안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나 정치인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나라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지켜야 하나. 

지난해 3월 대통령 탄핵 이후 우리는 나라 안팎으로 숨 가쁘다. 북한 핵·미사일은 그대로인데, 15여 일 후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린다. 반전이 거듭되는 변화 속에서 한국 정치는 예측 불허 국면을 맞고 있다. 탄핵은 국내 문제였지만 북핵과 평창동계올림픽은 동북아, 나아가 세계 평화와 연계된 문제다. 지난 40여 일간 미국 ‘뉴욕타임스’는 북한과 한반도 문제를 하루걸러 한 번꼴로 크게 다루고 있다. 앞으로 이 빈도는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 대신 전쟁을 원하는 국민이 있을까. 한국 정치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우리끼리’만으로는,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지킬 힘부터 길러야 한다. 

헌법 전문에 나오듯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상식이 돼야 한다. 북한 핵을 그냥 두면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될 수 없고, 국민도 행복할 수 없다. 

북한 김정은은 어떠한 경우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 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북핵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북·미 간 말 폭탄이 오가는 동안 북한과 김정은은 세계적 관심사로 등장한 반면, 한국의 위치와 존재감은 약해지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급변화한 북한의 태도는 희망적이지만 그럴수록 냉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적폐’를 두고 한쪽에선 ‘정치개혁’, 다른 쪽에선 ‘정치보복’이라고 읽는다. 적폐청산은 양날의 검이다. 일방통행으로 몰아붙인다면 훗날 새로운 적폐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개혁이란 먼저 제 살을 깎아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점을 아직까지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내로남불’ 또는 ‘포퓰리즘 선심 정책’이란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권력을 가진 자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 허물을 먼저 돌아본 후 남을 보는 것이 김구 선생의 좌우명이자 생활 태도였다.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를 받는 19대 국회의 법안 가결률은 16%였다. 유감스럽게도 20대 국회의 현재(1월 23일 기준) 법안 가결률은 10%에 불과하다. 이대로라면 20대 국회는 역대 최저 ‘불임 국회’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런 국회가 국민 눈에는 ‘봉숭아학당’처럼 비치고 있다. 신뢰도나 도덕성 조사를 하면 매번 꼴찌로 나온다. 사실 우리나라 국회의원처럼 바쁜 직업도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초선의원은 “국회에 와서 두 번 놀랐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이 바쁘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처럼 바쁘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에 더 놀랐다”는 것이다.


개헌 통해 권력 분산 절대적 필요

문제는 무엇으로 바쁘냐는 점이다. 알고 보면 유권자인 지역구민에게 ‘얼굴’을 보여야 해 바쁘다. 그러니 전문가나 관련 단체와 대화 및 토론, 각종 조사, 민원 청취, 내부 토론 등 직무 관련 활동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상시 국회’의 제도화가 시급하다. 국회 문을 늘 열어두고 토의, 토론,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 헌법을 보면 ‘정당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현실은 밀실이나 막후에서, 또는 청와대나 소수 실세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세비 감축, 의원 정수 축소, 비례대표 확대, 면책특권 폐지 등은 국회 개혁을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지만 이는 해법이 아니다. 국민은 휴회·정회·싸움·거짓 없는 국회를 원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국회가 있었다. 바로 ‘제헌의회’다. 1년 365일 중 320일 동안 문을 열고 휴일도 반납한 채 밤늦게까지 국정에 매진하던, 트럭을 타고 집단 출퇴근하던 제헌의회 정신으로 돌아갈 때 국민의 믿음은 살아날 것이다. 

전 정권과 현 정권의 암투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제왕적 대통령’으로 출발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는 1987년 헌법 체제와 결별해야 한다. 개헌으로 대통령 권력을 분산하는 길만이 제도적으로는 거의 유일한 해법이다. 그러려면 현직 대통령의 열린 마음, 포용의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역대 어느 대통령도 실천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불행해졌다. 

지금 대한민국은 북한 핵·미사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일본군 위안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여러 난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밀려오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으로 한반도에 해빙 기운이 감돌지만 올림픽 이후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힘겹게 쌓아온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터전을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절절한 각오만이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한다. 먼저 대통령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진정한 소통, 국민 통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은 ‘안전이 확보된 나라, 자유가 숨 쉬는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있다. 국민이 나서야 나라를 지킨다.




주간동아 2018.01.31 1124호 (p62~63)

  • | 윤융근 화정평화재단 · 21세기평화연구소 기자 yun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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