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1

2017.03.29

와인 for you

유럽의 섬세함과 미국의 화려함

미국의 토레스 와인 ‘마리마르’

  •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sangmi1013@gmail.com

    입력2017-03-28 13: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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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마르 토레스(Marimar Torres)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와이너리를 소유한 토레스 가문의 외동딸이다.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가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이역만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험난한 와인 생산자의 길을 걷고 있다. 무엇이 그의 삶을 바꾼 것일까.

    마리마르는 1945년생으로 올해 72세다. 그가 성인이 될 무렵인 1960년대 중반 스페인은 프랑코 독재 치하의 극도로 보수적인 사회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제한됐고, 집안의 와인 사업도 남자들의 몫이었다. 가족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좋은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를 졸라 바르셀로나대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 아버지와 오빠를 설득해 와인 수출을 담당했다. 토레스 와인을 홍보하고자 세계 곳곳을 여행하던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여기야말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임을 확신한 것이다.

    1975년 마리마르는 샌프란시스코에 토레스 북미 지사를 세웠다. 연간 18만 병 수준이던 수출량이 10년 뒤 180만 병으로 늘어날 만큼 사업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와인을 만들고 싶었던 마리마르는 포도 재배지를 찾아 나섰고, 2년간 조사 끝에 샌프란시스코 북쪽 소노마(Sonoma)에서 최적지를 발견했다.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포도밭을 일궜다. UC데이비스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를 공부하며 주경야독하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마리마르가 만든 첫 번째 와인은 1989년산 샤르도네(Chardonnay)였다. 이웃의 양조시설을 빌려 만든 이 와인을 그는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아버지는 이제까지 마셔본 화이트 와인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칭찬하며 마침내 와이너리 설립을 허락했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이었다.



    1992년 와이너리가 완성되자 마리마르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피노 누아르(Pinot Noir)와 샤르도네 클론을 심었다. 지금까지 이 와이너리는 포도밭을 유기농으로 경작하고 관리도 수작업으로만 해왔다. 기계를 전혀 쓰지 않으니 연 생산량이 7만 병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대량생산보다 질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게 훨씬 더 값어치 있다고 믿는다.




    마리마르의 피노 누아르와 샤르도네는 우아하면서도 강단이 느껴진다. 잘 익은 체리와 자두향이 풍부한 피노 누아르는 톡 쏘는 매콤함과 매끈하면서도 짱짱한 타닌이 매력적이다.

    샤르도네는 사과, 레몬, 복숭아, 파인애플 등 다양한 과일향이 맛깔스럽고, 질감이 크림처럼 부드럽다. 두 와인 모두 유럽 와인의 섬세함과 미국 와인의 화려함을 겸비한 역작이다.

    한 달 전 나는 소노마를 여행하다 마리마르의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포도밭과 양조장을 둘러보고 온 내게 마리마르는 손수 만든 음식과 와인을 차려줬다. 식사하는 내내 그는 자신의 와인을 자랑하기보다 음식과 와인이 입에 맞는지 물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밥 한 끼 먹이려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마리마르의 와인이 왜 맛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애정. 그것이 그가 훌륭한 와인 생산자가 된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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