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0

2017.03.22

국제

아세안 회원국, 北에 등 돌리나

김정남 암살 여파…‘아세안지역안보포럼’서 축출 주장도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7-03-17 18: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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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김정남 암살 사건 이후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 회원국 사이에서 북한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있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화학무기 VX로 김정남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난 데다 북한이 비상식적인 오리발 전략에 나서 이들 회원국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것. 이들 회원국은 김정남 암살 사건 최종 수사 결과와 이에 따른 말레이시아 당국의 향후 북한과 관계 단절 여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정부는 체포된 여성 용의자 도안 티 흐엉과 시티 아이샤가 자국민으로 확인되자 상당히 분개하고 있다. 김정남에게 VX로 직접 공격을 가한 두 여성 용의자는 살인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이미 대사를 각각 추방했다. 북한은 말레이시아의 수사에 불만을 품고 평양에 체류해온 말레이시아 외교관과 가족 등 9명을 출국 금지해 사실상 인질로 삼았다. 조직폭력배 같은 북한의 행태는 국제사회에서 전례 없는 조치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 정부와 국민은 김정남 암살과 VX 사용만으로도 단교해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북한이 말레이시아를 겁박하자 폭발 일보 직전이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북한의 끔찍한 인질외교는 모든 국제법과 외교 규범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과 외화벌이 노동자 등 북한인들의 출국을 금지했다. 또한 방문비자로 입국해 불법으로 일해온 북한인 140명을 무더기로 체포하기도 했다.



    북한의 조폭 같은 행태는 전례 없어

    그러나 말레이시아 정부는 북한이 억류한 자국민의 안전을 고려해 더는 추가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라작 총리는 “북한이 출국 금지한 국민을 귀환케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내각에 “북한과 대화를 통해 김정남 암살 사건과 인질 사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말레이시아는 북한 측에 자국 억류자의 출국 금지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김정남 시신 인도와 말레이시아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한 2등 서기관 현광성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의 귀국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치외법권 지역인 북한대사관에 피신해 말레이시아 경찰이 검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이 협상을 통해 서로의 요구를 어떻게 조율할지 아직은 불투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북한이 인도네시아 및 베트남 여성을 포섭해 김정남을 살해한 것은 명백히 말레이시아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점이다. 특히 화학무기로 민간인을, 그것도 공항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공격한 일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민의 귀환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에 모종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이 말레이시아 국민을 계속 억류한다면 말레이시아 정부는 초강경 대응에 나설 것이 틀림없다. 라작 총리가 “말레이시아 국민을 우롱하지 마라”고 북한에 경고한 것도 향후 조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아세안 회원국도 말레이시아의 조치에 동조할 개연성이 높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와 같은 처지다. 이 경우 아세안과 북한의 관계는 크게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그동안 아세안의 전통적인 비동맹 외교 노선을 적극 활용해 10개 회원국과 모두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1960, 70년대만 해도 북한은 아세안에서 한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때 형성된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실제로 공산당 일당체제인 베트남과 라오스는 북한과 ‘당 대 당’ 관계를 맺고 있다. 또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은 생전에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였다. 시아누크는 김일성의 주선으로 북한 여성을 16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북한은 2015년 만수대 창작사 소속 예술가 60여 명을 파견해 캄보디아 고대유적 앙코르와트 인근에 앙코르파노라마박물관을 건립했다.

    아크멧 수카르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김일성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을 상징하는 꽃 ‘김일성화’는 인도네시아산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김일성이 식물원에서 한 난초를 오래 감상하자 수카르노 대통령이 이 꽃을 김일성에게 선물로 보냈다. 북한은 이 꽃으로 매년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축제를 연다. 아세안 일부 회원국은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에 북한 인력을 파견해 식당 운영 등 영업활동을 활발하게 펼쳐왔다. 아세안 회원국은 국제사회가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할 때도 북한의 ‘숨구멍’ 구실을 해왔다.



    아세안 회원국은 북한의 ‘숨구멍’

    하지만 아세안 회원국은 더는 북한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이 확실시된다. 아세안 회원국 가운데 북한과 가장 친밀하다는 캄보디아조차 최근 북한과 거리를 두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에 우려를 표명했고,리수용 외무상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문을 거부했으며, 북한의 훈센 총리 초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국인 라오스는 북한 측 반대에도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을 규탄하는 성명을 채택하는 데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앞으로 김정남 암살 사건을 계기로 아세안 회원국은 북한과 관계를 단절할 개연성이 높다. 아세안은 앞으로 외교장관 회담 등을 통해 북한 제재조치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 일부 회원국은 이번 기회에 북한을 아예 ARF에서 축출하자는 강경한 주장도 하고 있다.

    북한은 매년 아세안이 개최해온 ARF에 참가해왔다. ARF는 아세안 주도로 1994년 7월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의 건설적인 대화와 상호 신뢰 증진을 통해 역내 평화 및 안정을 추구하려는 목적으로 출범한 다자 정치·안보협의체다. ARF에는 아세안 10개 회원국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등 아세안의 대화 상대 10개국, 북한을 비롯한 몽골과 스리랑카 등 기타 7개국 등 모두 27개국으로 구성돼 있다. 북한은 2000년 ARF에 가입했다. ARF는 국제사회에서 ‘불량 국가’로 낙인찍힌 북한이 자국의 주장을 밝힐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외교 무대였다. 따라서 북한은 그동안 ARF에 외무상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해왔다. 게다가 북한은 ARF를 남북대화의 창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남북 외교장관이 공식 회담을 가진 것은 네 차례나 되고, 민감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공식 접촉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피력해왔다. 만약 아세안이 북한을 ARF에서 축출한다면 북한은 외교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고 고립이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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