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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수입 규제, ‘플랜B’ 없는 韓 정부의 무기력 대응

먼저 일본 기업에 타격 주겠지만, 제재가 길어지면 한국 기업이 위험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9-07-05 17: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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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개막 환영식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한 뒤 등을 돌려 이동하고 있다. [동아DB]

    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개막 환영식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한 뒤 등을 돌려 이동하고 있다. [동아DB]

    일본 정부가 7월 1일 반도체 원료의 한국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하자, 한국 정부와 기업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 원료와 부품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분간 한국 기업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일부 원료는 이미 국산화를 마쳤으며, 이 기회에 일본 이외의 다른 수입 경로를 개척할 수 있다는 의견에 근거한 것이다. 당장은 힘들 수 있으나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칠 변수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일본의 경제제재 기간이 길어지면 국내 반도체업계의 부담이 커진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으로 대응하겠다고 나섰지만, 실효성 있는 해결책은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시나리오별 대응책 세워놓은 한국 반도체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이 7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수출상황 점검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수출 규제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이 7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수출상황 점검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수출 규제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일본이 7월 4일부터 수출을 제한하겠다는 품목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감광제 리지스트 △에칭가스 등 세 가지다. 일본은 그동안 미국, 한국 등 27개국을 수출 허가 면제국인 ‘화이트 국가’로 지정했으나 8월부터는 한국만 제외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수출 제한 조치가 내려진 세 품목 모두 일본이 세계시장에서 매우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필름 디스플레이의 재료다. 폴더블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나 반도체 패키징에 주로 쓰인다. 감광제 리지스트는 반도체 기판 제작의 핵심 재료다. 두 제품 모두 세계시장 유통량의 90%를 일본 기업이 생산한다. 에칭가스는 반도체 세정에 쓰이는 고순도불화수소를 말한다. 일본 기업이 세계시장 유통량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업계는 일본 기업의 충성도 높은 고객이었다. 세 원료를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왔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와 국내 반도체업계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5월까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수입액은 총 1억296만 달러(총 1203억6000만 원). 이 중 일본산 제품의 비중이 93.7%였다. 감광제 리지스트는 같은 기간 수입액이 1억1266만 달러로 일본산 제품의 비중은 91.9%였다. 그나마 일본산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덜한 것이 에칭가스로, 전체 수입액은 6479만 달러고 일본산 제품의 비중은 43.9%였다. 

    일본 제품 의존도만 보면 반도체 생산에 바로 차질이 생길 것 같지만, 한국 반도체업계는 “당장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다. 제품 대부분을 국내에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의존도가 가장 높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양산 설비를 갖추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는 SK케미칼, SK이노베이션이 각각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생산설비 상업 가동을 할 예정이다. 감광제 리지스트는 비교적 상황이 어렵다. 금호석유화학, 동진쎄미켐, 동우화인켐 등 국내 업체들이 생산은 하고 있으나, 일본산과 품질 면에서 차이가 난다. 다행히 국내 화학소재 전문기업인 송원산업이 일본 기업과 비슷한 수준의 감광제 리지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일본 기업 손해가 더 커질 수도

    삼성전자의 주력 제품인 D램. [삼성전자]

    삼성전자의 주력 제품인 D램. [삼성전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에칭가스다. 에칭가스를 만드는 공정은 어렵지 않으나, 반도체 공정에서 필요한 것은 초고순도의 불화수소다. 현재 국내에는 일본 수준만큼 높은 순도의 불화수소를 만드는 기업은 없다. 하지만 관련 업계는 이미 일본산 에칭가스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중국산(수입액의 약 46.5%) 등 수입 경로를 다변화해둔 상태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도 7월 4일 “불화수소에 관해서는 우리 기업들의 준비가 끝났다”고 밝힌 바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국내 및 다른 해외업계 등 구입 경로를 새로 뚫어야 하는 만큼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산업 전체가 마비되거나 생산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이번 제재는 국내 관련 업체의 주가에 악영항을 미쳤다. 일본이 제재를 발표한 직후인 7월 1일 삼성전자, LG전자, LG디스플레이의 주가가 급락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3일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 신용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수출 규제가 장기화하면 한국 기업의 손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무역제재가 단기에 그친다면 국내 기업의 수지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유원재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일본의 수출 제한이 현실화할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국내 메모리 반도체업체는 생산에 차질이 생겨 생산량 감소, 재고 소진 등을 겪을 수 있다. 재고 과잉이던 메모리 업황이 긍정적으로 개선될 여지도 엿보인다”고 진단했다. 

    일본 정부의 무역제재로 한국만큼이나 놀란 곳은 일본 반도체 소재 생산 기업이다. 특히 에칭가스를 생산하는 스텔라케미파와 쇼와덴코, 감광제 리지스트를 취급하는 JSR의 주가가 약세를 보였다. 이에 일본 재계도 수출 규제 결정에 유감을 표했다. 사쿠라다 겐고 경제동우회 대표간사는 7월 2일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할 경우) 경제나 정치 측면에서 영향이 크다. 실제로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한국과 무역수지에서 흑자를 보고 있는 (일본) 반도체 기업을 건드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발뺌하는 일본 정부, 딴소리하는 아베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7월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관련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7월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관련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현지 언론과 학계에서도 우려가 이어졌다. ‘아사히신문’은 7월 3일 사설을 통해 ‘정치 목적에 무역을 사용하는 것’이라며 ‘자유무역원칙을 왜곡하는 조치는 즉시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코야마 히데히코 일본종합연구소 수석주임연구원도 극우성향의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소재 조달이 어려워진다면 한국 기업들은 해외 제조사로 거래처를 옮길 수 있다”고 밝혔다. 오사나이 아쓰시 와세다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이 조치의 유일한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라며 “한국과 일본이 다투는 사이 후발 주자인 중국이 반도체산업의 주도권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는 일본의 무역규제가 한국 사법부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이번 무역규제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에 관한 수출 관리상의 분류 재검토’ 문건을 발표했다. 이 문건은 ‘수출 관리 제도는 국제적인 신뢰를 토대로 만드는데, 관계 부처의 검토 결과 한일 간 신뢰가 현저히 손상됐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수출 규제 이유를 밝혔다.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에 대해서는 ‘국제적 평화 및 안전 유지를 위해서는 한국으로 수출하는 화물의 특례를 폐지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다. 즉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에 수출 규제를 가한다는 주장이다.

    실효성 적은 한국 정부의 WTO 제소

    7월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를 찾은 관람객이 전시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개 화면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7월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를 찾은 관람객이 전시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개 화면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7월 3일 “강제징용 문제는 역사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상 국가 간 약속의 문제다.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서로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안보를 위한 무역관리는 정부의 의무다. 상대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더는 우대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는 일본을 WTO에 제소하겠다고 나섰다. 즉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제11조를 근거로 일본 정부의 문제를 짚을 예정이다. 이는 회원국을 대상으로 관세 등에 따르지 않는 수출입 수량 제한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효성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WTO가 안보상 수출 제한이 정당하다고 본 사례는 거의 없다. 올해 4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무역분쟁에서 러시아가 안보상 이유로 수출을 제한한 조치가 유일하다. 러시아는 2014년 무력으로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이후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등 러시아 접경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에 군수물자가 들어 있을 위험이 있다며 우크라이나 제품의 자국 영토 통과를 막았다. 

    하지만 일본의 무역 규제가 간접 규제에 그친다면 승소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통상 전문가는 “일본이 규제할 품목만 알 뿐, 어떤 식으로 규제에 나설지 아직은 알 수 없어 승소를 속단할 수 없다. 직접 규제 대신 단순히 수출 절차를 복잡하게 하는 등 간접 규제를 펼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간접 규제만으로는 국제법상 책임을 묻기 어렵다. 충분히 확인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오히려 일본 측에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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