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리뷰

진리와 정의의 신봉자가 아니라 인의와 의무의 실천가를 택하라

정치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역설적 메시지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6-10 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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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좌의 게임’에서 대칭구도를 이루는 존 스노 - 대너리스 커플

    ‘왕좌의 게임’에서 대칭구도를 이루는 존 스노 - 대너리스 커플

    세르세이-제이미 커플. [사진 제공 · HBO]

    세르세이-제이미 커플. [사진 제공 · HBO]

    가장 성공한 미국드라마(미드)로 꼽히는 ‘왕좌의 게임’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11년 4월 17일 시작된 이 시리즈는 올해 5월 24일 시즌8 6회로 종영했다. 이날 시청자 수는 북미에서만 1930만 명. HBO 방송 사상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8년간 73회나 방영됐지만 시즌이 계속될수록 시청률이 동반 상승했다. 시즌1 최종회의 북미 시청자 수가 304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8년간 6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유럽과 아시아지역에서도 이 시리즈의 인기는 대단해 시즌5부터는 17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방영되고 있다. 최종 시리즈의 경우 그 수가 10억 명을 넘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게다가 파일공유 전문 블로그 토렌트프리크에 따르면 이 시리즈의 불법다운로드 횟수는 2012년 북미지역 시청자 수를 능가한 428만에 이른 이후 6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막장드라마의 끝판왕?

    이 드라마가 이토록 인기를 끈 이유는 예측불허의 스토리 전개 때문이다. 미국 소설가 조지 R. R. 마틴이 쓴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웨스테로스라는 가상의 대륙을 누가 통일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진 영웅서사다. 그 최종 승자가 앉게 될 철왕좌(iron throne)를 놓고 일대 쟁투가 벌어지는 것을 드라마 제목으로 압축한 것이다. 

    여기에 웨스테로스 북쪽 장벽 너머에서 죽은 자들의 군대를 키우고 있는 백귀(white walker)와 웨스테로스 동쪽 바다 건너 에소스 대륙의 여러 이민족 간 다양한 합종연횡이 펼쳐진다. 웨스테로스는 영국 중심의 중세 유럽을 닮았고, 백귀 세력은 바이킹, 에소스 대륙은 아시아를 연상케 한다. 

    실재와 가상, 역사와 현실이 뒤엉킨 이 공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이다. 시리즈마다 주인공급 인물이 등장하지만 여름철 반딧불처럼 명멸한다. 북쪽 국경을 지켜온 충직한 북왕국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숀 빈 분)나 그의 장자이자 전쟁영웅인 롭 스타크(리처드 매든 분), 신실함과 청렴함 거기에 강력한 카리스마까지 갖춘 종교혁명가 하이 스패로(조너선 프라이스 분), 장벽 북쪽 야인들을 독립된 자유인의 민주적 공동체로 구성해낸 만스 레이더(키어런 하인즈 분)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해 인간적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잔뜩 매료시켰다 정말 어이없이 스러진다. 



    그런데 실제 우리네 역사가 그러하지 않은가. 무수한 사람의 신망을 모았던 영웅이나 천재가 어이없이 암살되거나 요절하고, 반대로 지리멸렬하고 비루한 인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던가. ‘왕좌의 게임’에선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 따위는 없다. 그 대신 욕망 앞에 한없이 약한 인간과 그로 인한 음모, 배신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잔인한 살해, 근친상간, 인육 먹기 등 보기 불편한 장면들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게다가 하늘을 날며 불을 토하는 용이나 좀비가 등장하고, 심지어 죽었던 인물이 프랑켄슈타인처럼 살아나고 예수처럼 부활한다. 여기에 출생의 비밀 같은 한국식 막장드라마의 설정이 더해졌다. 서로 사랑하게 된 주인공 연인이 알고 봤더니 고모와 조카 사이라는 식이다. 

    그렇다고 ‘악인전’이냐면 그건 또 아니다. 라니스터 가문의 수장으로 권모술수의 화신인 타이윈 라니스터(찰스 댄스 분)는 화장실에 앉아 있다 민망한 죽음을 맞는다. 또 ‘리틀 핑거’라는 귀여운 별명과 달리 이해타산이 분명하던 피터 베일리시(에이든 길렌 분) 역시 평소 애송이 취급하던 스타크 가문의 막내딸 아리아(메이지 윌리엄스 분)로부터 허망한 죽임을 당한다. 극중 최고 사이코패스라고 할 만큼 변태적 악마로 등장한 램지 볼턴(이완 리언 분)은 시즌6에서 자신이 키우던 사냥개들에게 잡아먹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얼음과 불의 정체

    사실 시즌3부터는 무수한 인물이 명멸하는 이 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드러난다. 원작소설의 제목에서 얼음과 불을 상징하는 인물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얼음은 ‘겨울이 오고 있다’는 뜻의 ‘윈터 이즈 커밍(Winter Is Coming)’이 가훈인 스타크 가문의 서자 존 스노(키스 해링턴 분)다. 이름에 이미 눈(웨스테로스 북부지역의 서자들이 쓰는 성)이 들어가 있는 그는 몇백 년에 한 번 오는 추위가 몰아닥칠 때 몰려올 백귀를 감시하고자 독신서약을 하고 집단생활을 하는 야경대(Night Watch)에 자원해 추위와 무관심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인다. 

    불은 한때 철왕좌의 주인이던 타가리옌 왕조의 유일(?)한 혈통인 대너리스(에밀리아 클라크 분)다. 광기에 사로잡혀 시해된 ‘미친 왕’ 아에리스 2세의 막내딸인 그는 와신상담을 노리는 오빠 비세리스(해리 로이드 분)에 의해 에소스 대륙의 기마민족인 도트락인의 왕 칼 드로고(제이슨 모모아 분)에게 팔려간다. 하지만 드로고가 요절한 뒤 그 시신을 태우는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온전히 살아 돌아온다. 이때 결혼선물로 받은 드래건 알에서 드래건 3마리가 함께 부화하며 ‘대초원 바다의 칼리시’(도트락인들의 여왕)이자 ‘용들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이후 민중의 해방자를 자처하며 에소스 대륙의 정복군주가 된다. 

    시즌7에서 이 예상은 맞아떨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인류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백귀의 침공에 맞서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가장 명예로운 남자’와 ‘가장 정의로운 여자’의 만남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귀결된다. 시즌7 마지막 회에서 존 스노의 친부가 대너리스의 큰오빠인 라에가르임이 밝혀지면서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즌8 역시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시즌6부터 드라마가 원작소설을 앞질러가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와 더불어 호흡이 빨라지고 치밀하던 짜임새가 허술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실제 시즌6까지는 매 시즌 10회씩 방영됐으나 시즌7에선 7회, 시즌8에선 6회로 횟수가 줄어들었다. 뒤로 갈수록 제작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져 시즌8의 회당 제작비가 1000억 원을 넘었기 때문이라곤 하지만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쫓아가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 토마토의 ‘신선도 지수’가 다른 시즌에선 90% 이상을 기록했지만 시즌8은 역대 시즌 중 가장 낮은 70%에 그쳤다. 용두사미식 결말에 실망했다며 시즌8을 다시 만들어달라는 온라인 청원에 서명한 사람도 6월 5일 현재 160만 명을 넘어섰다. 

    실제 웨스테로스에 침입한 백귀의 좀비부대와 존 스노-대너리스 연맹의 윈터펠(북왕국의 수도) 대회전을 그린 3회나 존 스노-대너리스 연맹군의 칠왕국 수도 킹스랜딩 함락전을 다룬 5회의 경우 스펙터클한 볼거리는 많을지 몰라도 짜임새가 너무 허술했다. 3회에선 드래건을 2마리나 동원하고도 불에 약한 좀비부대에 졸전을 면치 못하던 연맹군이 5회에선 드래건 한 마리를 앞세워 웨스테로스의 주력 함대와 도시 전체를 통째로 불태워버린다.

    존과 대너리스 vs 제이미와 세르세이

    왕좌의 게임의 최종 승자가 되는 브랜 스타크(왼쪽)와 3마리 용을 거느리고도 최종 승자가 되지 못하는 대너리스 타가리엔. [사진 제공 · HBO]

    왕좌의 게임의 최종 승자가 되는 브랜 스타크(왼쪽)와 3마리 용을 거느리고도 최종 승자가 되지 못하는 대너리스 타가리엔. [사진 제공 · HBO]

    하지만 최종회를 통해 비로소 최고 정치드라마로서 진가가 드러난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난쟁이 티리온 라니스터(피터 딘클리지 분)와 존 스노가 최종회에서 나누는 대화에 그 핵심이 들어 있다. 

    대너리스의 핸드(재상)가 된 티리온은 킹스랜딩 시민의 학살을 막으려다 결국 대너리스의 역린을 건드려 반역죄로 처형될 위기에 처한다. 티리온을 면회 간 존은 독선과 아집에 빠진 대너리스를 대신해 왕이 되라는 티리온의 부탁을 거절하며 “사랑은 의무의 죽음(Love is the death of duty)”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티리온은 “멋있는 말이지만 때로는 의무가 사랑의 죽음(Duty is the death of love)일 때도 있다”고 답한다. 

    이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존-대너리스 커플의 대척점에 제이미(니콜라이 코스터 왈다우 분)-세르세이(레나 헤더 분) 커플이 서 있음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티리온의 형과 누나인 제이미와 세르세이는 1회부터 최종회까지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존과 대너리스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란성 쌍둥이인 제이미와 세르세이는 타가리옌 왕조 끝과 바라테온 왕조의 시작을 상징한다. 제이미는 왕실 경호대인 킹스가드의 일원임에도 아에리스 2세가 수도 킹스랜딩을 불태우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시해함으로써 타가리옌 왕조를 끝장내고 ‘국왕시해자(kingslayer)’의 오명을 뒤집어쓴다. 그의 누이인 세르세이는 그 뒤를 이어 바라테온 왕조를 여는 로버트 바라테온(마크 애디 분)의 왕비다. 문제는 둘이 금지된 사랑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왕좌의 게임’의 비극은 이 둘이 사랑을 나누는 현장을 스타크 가문의 차남인 브랜 스타크(아이작 햄스터드 라이트 분)가 우연히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들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세르세이의 종용으로 제이미는 어린 브랜을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충격 속에 하반신이 마비된 브랜은 과거와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음습한 비밀을 알게 된 스타크 가문은 결국 풍비박산이 나고 서자인 존 스노를 비롯한 형제자매가 뿔뿔이 흩어진 채 처절한 생존투쟁을 펼친다.

    사랑은 의무의 죽음 vs 의무는 사랑의 죽음

    존 스노(왼쪽)와 티리온 라니스터. [사진 제공 · HBO]

    존 스노(왼쪽)와 티리온 라니스터. [사진 제공 · HBO]

    존-대너리스 커플은 제이미-세르세이 커플의 닮은꼴이다. 알고 저질렀느냐, 모르고 저질렀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근친상간의 죄를 저질렀다. 제이미가 충성을 맹세한 아에리스 2세를 죽인 국왕시해자라면 존 역시 최종회에서 충성을 맹세한 대너리스의 주화입마(走禍入魔)를 막고자 눈물을 머금고 시해한다는 점에서 결국 여왕시해자(queenslayer)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런 존의 희생에 의해 타가리옌과 바라테온 왕조가 종지부를 찍고 혈통으로 승계되지 않은 민주적 왕조가 시작된다. 

    따라서 ‘사랑은 의무의 죽음’이라는 표현은 티리온이 사랑했던 형제자매인 제이미-세르세이를 상징한다. 제이미는 명예를 버리고 사랑을 택했기에 자신과 주변을 불행하게 만든다. 또 세르세이는 오로지 자신과 제이미 사이에서 태어나거나 태어날 자식에 대한 집착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반대로 ‘의무는 사랑의 죽음’은 존 스노-대너리스를 상징한다. 두 사람은 사랑보다 의무를 택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존이 인의와 평화를 중시한다면 대너리스는 저마다 자기 몫을 찾아줘야 한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여자다. 그래서 존은 왕좌에 집착하지 않는 반면 대너리스는 자신이 곧 진리고 정의라는 독선에 사로잡히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폭력과 살육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막장드라마의 결론이라고는 믿기지 많을 정도로 고차원적이다. 결국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것은 개인적 욕망에 집착하기보다 보편적 사랑을 추구하는 의무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런 점에서 ‘왕좌의 게임’은 빼어난 정치드라마다. 지도자의 뜻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진리와 정의에 집착하는 정치는 필멸한다. 그 대안은 인의와 의무에 충실한 정치다. 그런 정치지도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티리온은 그 기준의 일단을 이렇게 제시한다. “우리들 중 살아온 인생에서 이야깃거리가 가장 풍성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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