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62

2018.11.02

국제

독재자 이미지 세탁+ 중동지역 영향력 확대

카슈끄지 살해사건으로 꽃놀이패 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 입력2018-11-05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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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측에 카슈끄지 살해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터키 대통령궁 홈페이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측에 카슈끄지 살해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터키 대통령궁 홈페이지]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그동안 독재자라는 말을 들어왔다. 특히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을 강하게 탄압해왔다. 실제로 2016년 군부의 쿠데타 기도를 진압한 터키 정부는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160개 이상의 방송사와 신문사를 폐쇄하거나 경영진을 바꿨다. 현재 터키 언론인 170여 명이 감옥에 수감돼 있다. 터키에서 최초로 창간된 신문인 ‘줌후리예트’의 경우 최고경영자(CEO)와 편집국장, 기자 등 14명이 테러조직을 도운 혐의로 각각 2년〜7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터키는 올해 180개국 가운데 157위를 기록했다. 터키의 한 원로 언론인은 “터키에서 언론은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며 “어떤 기사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밝혔다.

    에르도안, “카슈끄지 살해 책임자 규명하겠다”

    언론 탄압 등 철권통치로 비판받아온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사건 덕분에 ‘정의의 사도’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사우디 왕실을 비판해오던 카슈끄지는 10월 2일 재혼에 필요한 서류를 떼려고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간 이후 실종됐다. 사우디 관영 영자언론 ‘아랍뉴스’의 부편집장과 친개혁 성향의 일간지 ‘알 와탄’의 편집국장을 역임한 카슈끄지는 지난해 9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미국에서 ‘워싱턴포스트(WP)’의 객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사우디 차기 왕위 계승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의 개혁 정책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터키 언론들은 실종된 카슈끄지가 사우디 왕실이 파견한 ‘암살조’에 의해 총영사관에서 살해됐다는 의혹을 대대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터키 언론들은 살해 당시 녹음 파일 내용까지 공개했다. 이런 녹음 파일은 터키 정보기관이 사우디 총영사관을 도청하지 않으면 입수할 수 없기에 터키 정부는 녹음 파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만, 사실상 언론에 은밀히 흘렸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카슈끄지 살해사건에 ‘모르쇠’로 일관해오던 사우디 정부는 10월 20일 우발적 사고라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사우디 검찰은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에서 정부 요원들과 대화하다 주먹다짐이 벌어져 사망했으며 18명을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10월 24일 카슈끄지 살해사건의 전체적인 개요를 공개하면서 카슈끄지는 야만적인 살인의 피해자이고, 살인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우디 정부 측에 사건 용의자들을 자국 법정에서 재판할 수 있도록 신병을 넘기라고 요구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특히 그는 카슈끄지 살해 책임자를 반드시 규명하겠다며 사실상 무함마드 사우디 왕세자를 겨냥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에 놀란 사우디 검찰은 기존 발표를 번복해 카슈끄지 살해가 계획범죄라고 밝혔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과 무함마드 왕세자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등 사건 무마에 적극 나섰다. 무함마드 왕세자를 지지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터키에 파견해 사건의 자초지종을 파악하고 “사상 최악의 은폐”라며 사우디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터키, 미국과 관계 개선도 노려

    살해된 자말 카슈끄지(위). 카슈끄지 살해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는 터키 신문들. [알마나르, BBC]

    살해된 자말 카슈끄지(위). 카슈끄지 살해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는 터키 신문들. [알마나르, BBC]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중동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각광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꽃놀이패’로 활용하고 있다. 이란, 카타르와 우호적인 터키는 사우디와 늘 대립해왔다. 이에 터키는 이번 사건이 사우디의 소행이라는 정보를 언론에 조금씩 흘려가며 사우디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사우디 정부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터키와 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터키는 통화인 리라화의 약세에 따른 외환위기와 재정악화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공세를 가하는 것은 사우디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얻어내려는 속셈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 왕실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낮추고 카슈끄지 살해사건을 어느 정도 무마해준다면, 사우디 왕실은 그 대가로 대터키 투자를 대폭 늘리고 부채까지 해결해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또한 시리아 내전 사태 해결에서도 사우디의 협력을 받아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시리아 내전에 참여한 쿠르드족 민병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족 민병대는 터키 쿠르드족과 연계해 독립을 추구해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우디 정부에 쿠르드족 민병대 지원 중단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대화하고 있다.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대화하고 있다.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미국과 관계 개선에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터키 정부가 미국인 앤드루 브런슨 목사를 쿠데타 세력을 도운 혐의로 구금해온 사실에 분노했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브런슨 목사는 석방됐지만, 양국은 아직도 감정의 응어리를 풀지 않았다. 게다가 터키 정부는 미국의 반대에도 러시아로부터 최신예 미사일 요격 시스템인 S-400을 도입할 계획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통해 중동지역의 최대 미국 동맹국인 사우디의 발목을 잡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에 대한 대규모 무기 수출을 유지하고, 이란의 석유 수출 금지 등 강력한 제재를 추진하려면 사우디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사우디의 협조 여부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도 에르도안 대통령의 행보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레바논 베이루트 소재 카네기중동센터의 마하 야히아 소장은 “에르도안 대통령은 카슈끄지 사건을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실리와 양보를 끌어내는 기회로 삼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떨어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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