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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왜 피를 들끓게 할까

중세 ‘군중 축구’에서 기원한 일탈과 저항의 스포츠니까

축구는 왜 피를 들끓게 할까

공중으로 던져진 바(ba·아래의 근접 촬영한 가죽공)를 잡는 것으로 시작되는 ‘커크월 바’. [사진 제공·황소자리]

공중으로 던져진 바(ba·아래의 근접 촬영한 가죽공)를 잡는 것으로 시작되는 ‘커크월 바’. [사진 제공·황소자리]

러시아월드컵이 피날레를 앞두고 있다. 경기 결과를 놓고 세계 각국 사람이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깟 공놀이가 뭐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수많은 스포츠 가운데 유독 축구가 사람의 피를 들끓게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축구를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는 질문만큼 우문도 없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마다 저마다 전통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문자기록을 기준으로 국제축구연맹(FIFA)이 인정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2세기 무렵 탄생한 중국의 축국(蹴鞠)이다. 팀당 12~16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손을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를 이용해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상대편 장대의 망 속으로 넣으면 점수가 나는 경기다. 한국 역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를 즐겼다.


현대 축구의 기원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벌어진 ‘라 술’ 시합 장면을 담은 그림(1852).(왼쪽) ‘커크월 바’가 열리는 오크니 섬의 위치. [사진 제공·황소자리]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벌어진 ‘라 술’ 시합 장면을 담은 그림(1852).(왼쪽) ‘커크월 바’가 열리는 오크니 섬의 위치. [사진 제공·황소자리]

서양 기록으로는 기원전 7~6세기 그리스에서 유행한 에피스키로스와 이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제국 시절 하르파스툼이 가장 오래됐다. 하지만 파편적 기록으로 볼 때 12~14명이 한 팀을 이뤄 손발을 모두 이용해 소프트볼 크기의 작은 공을 놓고 상대 팀 골라인을 통과하는 것으로 승부를 겨룬 종목이라는 점에서 럭비나 미식축구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1586년 그린란드 이누이트(에스키모)족이 빙판에서 두 팀으로 나뉘어 축구 비슷한 경기를 하더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호주 원주민 역시 축구와 비슷한 공놀이 문화가 있었다. 

이런 무수한 역사에도 잉글랜드가 축구 종주국으로 불리는 이유는 1863년 잉글랜드축구협회 설립을 현대 축구의 기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하나의 스포츠로서 통일된 축구 규격과 규칙을 발표한다. 이어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아일랜드에도 축구협회가 생겼고, 1886년 맨체스터에서 이들 축구 협회가 모여 국제축구평의회(IFAB)를 설립한 뒤 국제축구 규정을 만들었다. 세계 대다수 나라가 월드컵에 단일팀 하나만 출전시키는 데 반해 영국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4개 팀이 나오는 것도 이런 전통에서 기인한다. 

이런 영국 축구의 전통은 중세 ‘군중 축구’에 있다. 군중 축구는 12세기 무렵 사순절 단식과 참회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진탕 먹고 마실 수 있는 봄철 축제 기간 마을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선수 수 제한이나 규칙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난투를 벌이며 공을 차지하려고 다투던 축구를 말한다. 영국에선 재의 수요일 직전 사흘간의 축제 이름을 따 ‘슈로브타이드(Shrovetide)’, 프랑스에선 건초나 왕겨를 채운 가죽공이란 뜻으로 ‘라 술(La Soule)’이라고 불렀다. 

축국이 주로 왕족이나 귀족이 즐긴 궁정 스포츠이고, 에피스키로스와 하르파스툼이 군사훈련용 스포츠였다면 군중 축구는 모든 금기로부터 해방되는 일탈의 일환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원시시대 사냥감의 대체물 또는 작물 성장을 촉진하는 태양의 상징물인 공을 쫓아 집단 난투극을 벌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공놀이 기원을 추적한 책 ‘더 볼’은 이런 군중 축구의 원형이 스코틀랜드 최북단에 위치한 오크니제도의 제일 큰 도시 커크월에서 매년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두 차례 열리는 ‘커크월 바’에 녹아 있다고 소개했다. 

이는 위쪽 내륙지역 주민인 어피스와 그 아래 항구지역 주민인 두니스 둘로 나뉘어 축구공 크기지만 3배가량 무거운 수제 가죽공 바(ba·스코틀랜드어로 공)를 차지해 서로 자기네 지역 목표 지점에 갖다 놓는 시합이다. 성인 남성 100명 이상이 참여하고 발은 물론 손을 써도 되며, 서로 스크럼을 짜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도심 중앙 광장에서 열리기 때문에 방호망을 치지 않은 상점 유리창이 박살나거나, 멋모르고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가 폐차 수준으로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승패가 나뉘는 데 보통 한나절 이상이 걸리고 시합이 끝나면 거나한 파티가 열린다.


독재자의 머리를 차라

대략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커크월 바의 기원을 알면 더 몸서리치게 된다. 당시 오크니제도는 툭 튀어나온 앞니 때문에 ‘터스커(Tusker)’로 불리던 폭군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수도 커크월에 사는 한 젊은이가 잠시 수도를 비운 터스커를 죽이고 그 증거로 목을 가져오겠다고 맹세했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말 안장 머리에 전리품을 매달고 오다 터스커의 긴 앞니에 허벅지를 찔려 파상풍에 걸렸다. 그는 커크월에 도착해 중앙 광장에 터스커의 목을 내던지자마자 숨을 거뒀다. 젊은 영웅의 안타까운 죽음에 분통이 터진 주민들은 안 그래도 밉살스러운 터스커의 머리를 발로 차며 거리를 누볐다. 

그러다 독재자의 머리를 가죽공이 대신하게 된 것이니 어찌 축구가 정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영국 왕실도 이런 군중 축구의 불온함을 일찍부터 눈치챘다. 그래서 에드워드 2세 시절 폭동과 혼란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1314년 이후 100년간 아홉 차례나 축구 금지령을 내렸다. 1440년 프랑스 한 주교도 “여흥의 탈을 쓴 악의와 원한, 적대감이 대중의 가슴에 축적된다는 측면에서 위험하고 유독한 경기”라며 금지를 촉구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민중은 이런 도덕적 교화와 법률적 금지령을 무시하고 계속 축구를 했다. 미국 스포츠사학자 윌리엄 베이커는 이런 영국 민중의 축구 애호를 “그들은 권리라 할 만한 것을 거의 갖지 못했지만 놀이할 권리만큼은 생득권의 불가결한 일부로 간주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전통이 현대 축구가 성립된 19세기에 분출된 민족주의와 만나면서 오늘날까지 정치적 스포츠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커크월 바의 경우 12세기 무렵 바이킹 출신 노르웨이 귀족의 통치를 받던 해안가 주민 두니스와 오크니 주교의 통치를 받던 내륙 주민 어피스 간 오랜 라이벌 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맨체스터 시티,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대 FC 바르셀로나 같은 라이벌 팀 간 대결(더비)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세계 최고 축구리그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꼽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두 나라는 모두 4개 왕국의 연합국가라는 점에서 자칫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지역 간 대결의식을 축구라는 ‘피 끓는 스포츠’를 통해 대리 분출하는 오랜 전통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2018.07.18 1147호 (p6~7)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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