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7

2018.05.09

법통팔달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질질 끄는 재판

  • 입력2018-05-08 14: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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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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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법언(法諺)이 있다. 올바른 결정이라도 그것이 너무 늦춰지면 올바르지 못함으로 귀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래된 말이다. 미국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도, 법률가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도 이 말을 한 적이 있다. 

    법에 관한 이 격언은 재판에도 적용된다. 어쩌면 가장 잘 들어맞는 경우다. 생각해보자.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하급심에서 쟁점을 놓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유죄를 선고받았고 천신만고 끝에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아 구제되는 일이 심심찮게 보도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일이다. 청춘의 피고인이 반백의 늙은이가 돼 감방에서 나온다면 그에게 남은 인생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민사재판도 마찬가지다. 송사에 휘말려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나중에 승소한다 한들 수중에 남은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가 된 후다. 그나마 진실을 밝히고 구겨진 정의라도 얻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국한된다. 

    그런데 재판은 어느 한 심급에서 부당하게 지연되는 경우가 적잖다. 믿기지 않겠지만, 판결문 쓰는 데 자신이 없어 가급적 선고를 하지 않으려 드는 판사도 있다. 어느 지방 지원장은 선고 후 판결문을 쓰지 않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 감독 지방법원에서 다른 판사를 파견해 주문에 맞게 판결문을 쓰게 했다. 

    보통 판결문 쓰기를 꺼리는 판사는 쓸데없이 작은 일을 꼬투리 잡아 자꾸 재판을 다음 기일로 넘겨버린다. 원고 · 피고 양측의 간청에 결심을 해도 선고기일에 다시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변론 재개를 해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임기 내내 제대로 된 판결을 한 건도 선고하지 않은 판사도 있었다. 이 같은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일부는 “극단적 사례를 들어 법원을 비판하느냐”고 꾸짖을 수 있겠다. 하지만 국민 눈에는 이런 희소한 사례가 결코 호수 위에 뜬 나뭇잎 한 장처럼 비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호수에 가라앉은 수많은 나뭇잎을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사법행정 당국도 재판 지연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미흡하다. 1999년 9월 16일 헌법재판소는 판사에게 신속히 재판해야 할 어떠한 법률상 의무나 헌법상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시(98헌마75 사건)한 바 있다. 이는 우리의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헌법 제26조 취지를 살리지 못한 결정이다. 물론 반대의 취지로 판시했을 경우 그것이 몰고 올 엄청난 파장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연된 재판이 현저히 부당한 것이라면 그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구제하는 식으로 결정해야 마땅하다. 

    지금 국민의 ‘사법 불신’은 심각하다. 사법개혁이 대대적으로 추진돼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사법개혁을 한다면 공정한 재판의 실현 방안을 마련하면서 그중 하나로 재판의 부당한 지연을 방지할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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