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5

2018.04.25

사회

“침묵의 공화국에서 횃불 든 ‘4월 혁명 선구자’”

“독재는 저항으로 맞서야 한다는 ‘발칙한 도전’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

  • 입력2018-04-24 13: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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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도화선 된 2·28 주역 이대우를 기억하는 이유

    1960년 2월 28일 경북도청으로 달려가는 경북고 학생들(왼쪽)과 선언문을 읽는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동아DB]

    1960년 2월 28일 경북도청으로 달려가는 경북고 학생들(왼쪽)과 선언문을 읽는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동아DB]

    이승만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돼 일으킨 4·19혁명이 올해 58주년을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19일 청와대 참모진과 서울 우이동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아 헌화한 뒤 방명록에 “4·19혁명의 정신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고 썼다.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자유당 정권이 내무부와 경찰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투표에 개입한 게 직접적 원인이었다. 경남 마산에서 시위를 벌이다 행방불명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전국적으로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농촌을 구하기 위해 평생 노력하자”

    아들 초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떠난 제주도 여행. 아들 이중화 교수는 미국 노스타코타대 커뮤니케이션학과에, 딸 이윤지 교수는 버클리음대 작곡과에 재직 중이다(위). 1960년 3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2·28 민주운동을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사진 제공 · 김향선 씨, 동아DB]

    아들 초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떠난 제주도 여행. 아들 이중화 교수는 미국 노스타코타대 커뮤니케이션학과에, 딸 이윤지 교수는 버클리음대 작곡과에 재직 중이다(위). 1960년 3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2·28 민주운동을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사진 제공 · 김향선 씨, 동아DB]

    그러나 마산 3·15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자 기폭제는 대구 2·28민주운동이었다. 문 대통령도 2·28민주운동 기념사에서 “우리는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국민이 권력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돌이켜보면 그 까마득한 시작이 2·28민주운동이었다. 3·15의거와 4·19혁명의 기폭제이자 대한민국이 국민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첫 번째 역사를 쓰는 순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4·19혁명 기념일에 2·28민주운동을 떠올리는 이유다. 

    2·28민주운동의 중심에는 이대우(1942~2009) 부산대 교수가 있었다. 처음 정부 주도로 치른 올해 2·28민주운동 기념식 공연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으로서 2·28민주운동 결의문을 낭독한 이대우와 동기 성유보의 대역(뮤지컬 배우 하성민, 남경읍)이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막이 올랐다. 성유보(1943~2014) 선생은 평생을 반독재운동과 언론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알려진 반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이대우 교수는 2·28민주운동과 4·19혁명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며 교육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1942년 경북 상주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평생 농부로 살 것 같은 답답한 마음’에 담임교사에게 “서울로 유학시켜달라”고 졸랐고, 부친은 일종의 타협책으로 대구 유학을 권했다. 이대우의 유고집 ‘2·28은 살아있다’를 보면 그는 당시 대구 경상중에 입학했지만 도시생활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냉돌인 자취방에서 잠을 잘 때면 ‘왜 도시 사람들은 농촌 사람보다 잘살고 모두 초가집보다 더 큰 집에서 사는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낸다. 



    “도시와 싸움에서 이기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농촌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자. 그리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학생회로 뛰어들자.” 

    그는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의 ‘흙’ 등 농촌문학에 심취하면서 경상중 학생회장에 뽑혔고, 경북고에 진학해서도 학생부위원장 선거에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당선한다. 광복 이후 최초의 민주적 저항운동인 2·28민주운동도 그가 ‘도시와 싸움’을 고민하던 대구 동인동 냉돌방에서 시작됐다. 문 대통령 표현대로 ‘바위에 계란 치기 같았을 최초의 저항’이 움튼 곳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릴 예정이던 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선거 연설회에 많은 인파가 모일 것으로 예상되자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이 유세장에 나가는 것을 막고자 각종 편법을 동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상대이던 조병옥 박사가 월터 리드 미 육군병원에서 급작스럽게 타계하자 야당인 민주당은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에 집중했고, 자연히 부통령 선거에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당시 대구지역 고교 상황은 이렇다.

    “3·15 선거를 앞두고 2월 27일에는 여당인 자유당, 그리고 일요일인 2월 28일에는 야당 장면 박사의 강연이 대구 수성천서 개최됐다. 모든 학교는 되도록 야당인 민주당 강연에는 참석 못 하도록 학년말 시험을 앞당기고, 그래도 부족해 일요일에 등교하도록 했다. 경북고 교감은 교장실에 모인 학생대표들에게 일요일에 등교하라고 애원하고 훈육주임은 협박하고 있었다. 이때 이대우 부위원장은 ‘저희들은 평소에 선생님들로부터 불의를 보면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이 되라고 배웠습니다. 이 부당한 처사를 사회에 폭로하고야 말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중략) 27일 밤을 설치고 28일이 밝아왔다. 대의원 회의를 소집한 이대우 부위원장은 ‘내무장관 행차에는 수업시간에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박수를 치게 하면서, 국민이 뽑은 부통령이 오는 데도 환영은커녕 연설마저 못 듣게 하니 도대체 이게 민주정치입니까. 우롱만 당할 것입니까. 아니면 과감히 맞서서 투쟁할 것입니까’라고 외쳤다.”(김충섭, 1991년 3월 ‘자유발언’ 기고문 ‘독재 항거 횃불 든 2·28 데모와 이대우 군’ 중에서)

    “뜨거운 공포가 스쳐가는 밤”

    1960년 2월 27일 밤, 이대우 방에선 각 학교 학생회 간부 30여 명이 모여 구체적인 전략을 세웠다.
     
    “경북고, 대구고 등 각 학교 간부 30여 명이 우리 집 냉돌방에 둘러앉아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잉태되고 있었다. 모두 이의 없이 2월 28일 오후 1시를 기해 일제히 일요 등교 반대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경찰 저지선을 예상해 최저 대구 매일신문사까지는 가야 우리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28은 살아있다’ 중에서) 

    이날 모인 대표들은 인도 타고르의 시를 인용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사용하기로 하고 “철창에서 만나자”며 손을 잡았다. 이대우는 2월 27일 밤을 “뜨거운 공포가 스쳐가는 밤”이라고 묘사하면서 당시 상황을 “자유당 정권을 향해 누구든 감히 말 한 마디 못하는 침묵하는 공화국”이라고 썼다.
     
    약속한 이튿날 오후 1시, 경북고 학생 800여 명은 운동장 조회대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교련 교관과 일부 교사는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간부들은 조회대를 향해 밀고 들어갔다. 순간 이대우는 잽싸게 조회대 위를 향해 밀고 들어가 결의문이 담긴 두루마리를 펼쳤다. 

    “인류 역사에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중략)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중략)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중략) 최후의 일각까지 일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선언문 낭독이 채 끝나기 전 학생들은 “반월당으로 가자”고 외쳤으며, 교문을 박차고 학교에서 2km 떨어진 도청으로 향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이대우는 도청광장 중심에서 선언문을 펼쳤다. 그러나 다 읽지 못했다. 

    “경찰이 선언문을 낭독하는 나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제 학생들의 돌멩이는 경찰을 향하고 있었다. 도청광장은 투석전과 함성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일시에 경찰병력이 투입되고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곤봉 세례를 받으며 ‘백차’에 실려 가기 시작했다.”(‘2·28은 살아있다’ 중에서) 

    이날 현장에 있던 성유보는 “우리가 도청 마당에서 ‘(일요 등교를 지시한) 도지사 나와라’고 외치자 건물 기왓장이 들썩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오임근 도지사가 우리 앞에 나타나자 이대우는 ‘성명서’를 다시 낭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이대우가 우리들 앞에서 낭독한 글이 ‘성명서’라는 것, 우리가 대구 시내를 누비며 함께 도청으로 달려간 것이 권력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수단 중 하나인 데모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회고했다.

    강제로 지프에 태워진 채…

    이대우 교수의 제자인 자유한국당 백승주 의원(왼쪽)과 김홍수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 [동아DB]

    이대우 교수의 제자인 자유한국당 백승주 의원(왼쪽)과 김홍수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 [동아DB]

    결국 이대우 등 학생 200여 명은 경찰에 연행됐고, 그는 난생처음 고문의 고통에 직면했다. 치안국장 이강학은 대뜸 뺨을 후려갈기면서 그에게 ‘빨갱이’라고 했다. 1995년 2월 28일 ‘동아일보’ 인터뷰를 보자. 

    “저는 경북도경으로 연행됐습니다. 경찰은 ‘제5열과 민주당이 사주한 것이 틀림없으니 자백하라’고 족쳤습니다. 또 ‘진보당 당수 조봉암과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진술을 강요했죠. 조봉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이 박사는 독립운동한 것은 인정하나 친일파 척결을 하지 않아 민족정기를 흐렸고, 독재로 민족 장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고 했죠. 평상시 속에 있던 얘기를 다 했습니다.” 

    그는 미리 연행을 각오하고 취조받을 때 마음의 여유를 갖고자 콩을 한 호주머니 가득 넣어두었다 막상 심문받을 때 콩을 꺼내 먹었다(1963년 4월 19일 동아일보 인터뷰). 

    취조 중이던 밤 11시 이대우는 갑자기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로 경찰 지프에 태워진 채 대구 시내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이대우가 경찰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시민들이 도경으로 몰려온 데다, 대구 시내가 계속 술렁댔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 날 그는 형사 3명과 함께 경북 영일군 장기곶으로 일주일간 유배됐다.
     
    시민들의 성원을 목격한 경찰은 시위가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해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했지만 대구 고교생들의 해방 후 첫 시위 소식은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전국 학생들의 궐기와 시위가 이어졌다. 2·28민주운동이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최초의 자발적 행동이자,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느 나라에나 시대를 앞서 내다보는 선구자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대우를 비롯해 그와 함께 시위를 모의한 학생들이 모두 ‘4월 혁명’을 예고한 선구자라고 생각한다. 이대우는 그때 이미 ‘누가 자유를 노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하는가?’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독재에 대해 순종할 것이 아니라 저항으로 맞서야 한다는 ‘발칙한 발상’과 ‘발칙한 도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성유보, 2014년 1월 5일 ‘한겨레신문’ 칼럼 ‘대구 2·28 데모 이끈 경북고 이대우의 패기’ 중에서) 

    이후 이대우는 한국외대에 진학해 교수의 길을 걸으며 2·28민주운동과 4·19혁명의 체계적 연구 및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저술활동은 2·28민주운동이 역사적 의미를 찾고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따. 또한 그는 2·28민주운동과 4·18 고려대시위, 4·19 서울대시위 주역 26명의 출신지(농촌 출신 22명, 서울 출신 4명)와 사회적 이동경로를 분석하며 “4·19혁명은 누출된 부분만 보면 학생혁명이지만 그 뒷자리에는 거대한 농민이 민중의 주체로 자리 잡은 민중혁명”이라면서 ‘혁명의 확장성’을 강조했다. 전통문화와 권위주의, 의회 기능 말살, 자유당 정권 부패 등에서 4·19혁명의 원인을 찾으면서도 1960년 당시 34.2%에 이르던 총 실업률과 절대빈곤, 인플레이션 등 사회경제적 모순을 분석해 2·28, 4·19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대우의 여러 제자 가운데 김홍수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부산대 윤리교육과 교수)과 자유한국당 백승주 의원이 눈에 띈다. 15년 동안 연구실 조교를 하며 이 교수를 지켜본 김 비서관은 2010년 이 교수의 유고집 ‘2·28은 살아있다’ ‘지휘자 없는 합창’ 발간을 위해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이대우의 대표적인 제자다. 

    “평소에는 이만섭, 박관용 전 국회의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진보·보수 인사를 구분하지 않고 여러 분들과 교류했고, 꾸준히 투고 활동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이정표를 알렸다. 원고를 준비할 때는 관련 자료를 통독한 뒤 펜을 들어 단번에 글을 완성했다. 학생들에게는 늘 정의롭고 깨어 있는 지식인이 될 것을 강조했으며, 명절이 되면 담배 수십 보루와 양말을 손수 사 와서는 청소하는 아주머니와 경비실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인사하는 정(情)이 많은 분이었다. 연구실을 찾는 교수들에게는 항상 나의 이름을 빗대 ‘대우(大雨) 밑에 홍수’라며 소개했다.(웃음) 1988년 총선에 출마했을 때도 제자들이 선거운동을 도우려 하자 ‘선거는 내 몫이고 학업이 자네들 몫이네’ 하면서 만류할 정도로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민족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로서 보여준 이 교수의 올곧은 정신을 많은 제자가 따르려 노력하고 있다. 교수님은 생전 2·28과 4·19에 대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책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중국 전문가로서 현대 중국 정치에 관한 저서를 발간하길 염원하셨는데, 언젠가 그 염원을 이뤄드리고 싶다.”

    민족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

    문재인 대통령과 2·28민주운동 관계자들이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2·28민주운동 관계자들이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김 비서관의 말처럼, 그는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개혁 공천에 응하면서 부산 금정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민정당 김진재 후보에게 1766표 차로 아깝게 낙선하며 정치인의 꿈을 접었다. 앞서 유정회 등 정치권의 제안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선거 이후 부산대 교수회 회장과 21세기 정치학회장, 4월회 부회장 등을 지내다 2009년 9월 13일 타계해 국립4·19민주묘지에 안장됐다. 

    김 비서관에 앞서 연구실 조교를 지낸 백승주 의원은 그를 “자신의 안락함보다 늘 남을 챙기는 이타주의자”라고 기억한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중앙도서관에서 시작된 부마항쟁 당시 시위 현장에서 이 교수를 처음 뵀다. 국립대 교수 신분임에도 교수님은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의 부상을 늘 걱정했다. 신군부에 의해 단행된 (1980년) 5·17 비상계엄확대 반대시위에 참여한 뒤 교수님을 찾아뵙고 ‘휴교 조치로 공부를 못 해 군입대를 하겠다’ 했더니 ‘내 방에서 책이나 읽어보라’고 하시더라. 그게 인연이 돼 몇 년 동안 조교를 하면서 연구실에 있는 각종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는데, 그때 공부는 다 한 거 같다.(웃음) 당시 국립대 교수에게는 쌀을 교환할 수 있는 양권(糧卷)이 지급됐는데, 교수님은 항상 이 양권을 생활고로 힘든 운동권 선배들에게 전달하라는 ‘미션’을 내렸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부산지역 학생운동 주역들도 교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명절이 되면 제자들을 불러 삼겹살을 구워줬는데, 33㎡짜리 임대아파트는 두세 명이 앉으면 집 안이 꽉 찰 정도로 비좁았다. 벽돌을 쌓아 널빤지를 댄 식탁에서 고기를 먹으며 ‘자신의 안락함보다 늘 남을 챙기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대우 교수의 경북고 동기들과 제자들은 매년 4월 19일과 기일인 9월 13일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아 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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