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4

2017.11.22

커버스토리

키워드로 짚어보는 박정희 공과(功過)

18년 집권기, 경제발전 눈부셨지만 독재자 낙인 뚜렷

  • 입력2017-11-21 10: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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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63년 12월 17일부터 79년 10월 26일까지 제5~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군림한 박정희는 여전히 뜨거운 토론 대상이다. 역대 대통령(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가운데 박정희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이도 없다. 집권 18년 역사가 그의 사후 40여 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와 ‘경제 대통령’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엇갈리는 그의 족적을 7개 키워드로 되짚어봤다.


    01 파독광부·간호사

    파독 광부들이 석탄을 캐고 있는 모습.[동아DB]

    파독 광부들이 석탄을 캐고 있는 모습.[동아DB]

    5·16 군사정변 이후 1962년 국가재건최고위원으로 실권을 잡은 박정희는 그해 바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경제를 논하기에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척박했다. 여전히 보릿고개를 걱정해야 했고 축적된 자본도, 이름 있는 기업도 없었다. 실업률은 30%에 육박했으며 농촌 붕괴 현상이 심각했다. 결국 박정희는 63년 독일(옛 서독)로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 등 노동력 송출을 추진했다.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였고, 노동력이 부족한 상태였다. 

    어린 한국 간호사들은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하루 종일 딱딱하게 굳은 시체를 닦았고, 광부들은 지하 1000m의 깊은 땅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당시 이들에게 붙은 별명이 ‘코리아 에인절’이었다. 한국은 1970년대 중반까지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 기능공을 독일로 보냈다. 이들이 국내로 부쳐온 총 송금액은 1억153만 달러로 당시 수출액의 2%에 달했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경제부흥을 위한 종잣돈으로 쓰였다.


    02 한일협정

    박정희가 경제발전 자본금을 마련하고자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은 일본이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1952년부터 61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됐지만, 양측의 입장 차가 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65년 6월 22일 한국 정부는 일본 총리관저에서 전 국민적 반대에도 한일기본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 배상, 독도 관련 문제 등이었다. 앞서 64년 한일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학생들의 움직임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6·3사태를 일으켰다. 

    한편 한일협정을 옹호하는 여론도 있다. 당시 받은 돈으로 지금 같은 경제대국을 만들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1970년대 본격화된 중화학공업은 일본으로부터 원자재 수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정희는 미국 외자 도입과 일본으로부터 원자재 수입을 주도했다. 또한 일본의 원자재 부품을 국산화화는 과정을 통해 국내 가공 조립 산업을 발전시켰고 완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해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뤘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1960년대 민주화가 지속될 수 없었던 이유는 국민이 ‘정치적 자유’보다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를 먼저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03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

    1976년 당시 경제기획원이 발간한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한일협정 후 대일청구권으로 받은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사용됐다. 

    포항제철 건설은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적의 역사임이 분명하다.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 발전 과정에서 공작기계공업과 산업기계공업은 물론 자동차·선박, 전자공업에서 요구되는 소재 및 중간재의 자체 공급이 가능해짐으로써 한국의 공업화 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국가가 특정 기업을 지원한 게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당시 특정 산업의 성공을 이끈 비결로 꼽히기도 한다. 당시 소련(현 러시아)은 민간기업이 아닌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국영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집중화해 실패했다. 

    한국 산업화의 대동맥 구실을 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도 청구권 자금으로 이뤄졌다. 1968년 2월 총 연장 428km, 교량 305개, 터널 12개가 포함된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당시 박정희는 자금 유출을 엄청나게 단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설현장에 군 공병대 장교들을 대거 파견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그렇게 2년 5개월 만인 70년 7월 7일 세계 최단 기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밀어붙이기’ 식 공사로 77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04 월남 파병

    19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해 참전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동아DB]

    19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해 참전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동아DB]

    베트남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73년까지 한국 정부는 8년에 걸쳐 베트남으로 국군을 파견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고, 한국 정부는 미국의 지지와 원조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과 군사동맹을 강화했으며 외화를 획득하고 상품 수출을 늘리는 등 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 

    1964년부터 72년까지 우리 정부가 베트남에서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다. 이 가운데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에서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하다. 나머지 80%는 대(對)베트남 수출, 파월 기술자의 송금, 파월 지원 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익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기간 5000명 넘는 한국군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10배가 넘는 이들이 부상을 당했다. 고엽제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당시 병사들의 수당은 다른 군대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0달러밖에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유공자 보상 관련 논란이 일고 있다. 

    한편 11월 11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영상 축사를 통해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이는 과거 베트남전쟁 파병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사과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05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한 농촌마을 사람들이 관개배수로 작업을 하고 있다.[동아DB]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한 농촌마을 사람들이 관개배수로 작업을 하고 있다.[동아DB]

    1971년 ‘근면, 자조, 협동’을 모토로 시작한 빈곤퇴치·의식개혁운동이다. 스스로 노력하는 마을에 집중 지원하는 방식으로, ‘자조경쟁’을 유도해 농촌의 근대화를 이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제프리 색스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할 수 있다’는 정신이 최빈국을 50년 만에 원조하는 나라로 변신시켰다”고 말했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 등도 새마을운동을 세계 빈곤퇴치 모델로 채택했다.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개발도상국(개도국)은 새마을운동을 도입해 주거·식수는 물론, 환경만 탓하던 국민 의식까지 바꾸고 있다. 40여 년간 147개국 6만여 명이 한국을 찾아 새마을교육을 받았고, KDI 국제정책대학원과 영남대 새마을연구센터 등에서는 개도국 공무원 연수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문재인 정부는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예산 및 사업을 대폭 축소했다. 그러던 중 11월 13일 문 대통령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로부터 새마을운동 지원에 대해 감사인사를 받자 곧바로 참모들에게 “전(前) 정부 추진 내용이라도 성과가 있으면 지속적으로 추진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06 유신(維新)

    1972년 10월 박정희는 남북 분단의 현실과 국제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명분 아래,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당시 박정희는 헌법 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 해산, 정당 활동 금지 등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유신헌법은 평화통일과 민주주의, 경제적 평등 실현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 박정희 자신의 독재정치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를 통해 박정희는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애고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려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와 장기집권의 발판을 만들려 했다. 유신에 반대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압박도 거셌다.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소속 학생 약 180명을 민중봉기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기소한 ‘민청학련 사건’과 민청학련의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따르는 인민혁명당(인혁당)이 있다고 조작해 관련자를 구속기소한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이다. 

    강정인 서강대 교수는 “10월 유신이 없었다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훨씬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를 가졌다며 그를 비난했지만 결국 그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말했다.



    07 부마민주항쟁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부산 중구 중앙동 옛 부산시청 앞에 계엄군이 출동해 있다.[동아DB]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부산 중구 중앙동 옛 부산시청 앞에 계엄군이 출동해 있다.[동아DB]

    박정희는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단 1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9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하지만 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을 계기로 몰락했다. 부마민주항쟁은 국내 최대 가발업체인 YH무역 노동자들이 기업주가 경영난을 이유로 고의로 폐업하려 든다며 파업으로 맞서면서 시작됐다. 결국 회사가 폐업을 선언하자 노동자들은 신민당사로 옮겨가 농성을 계속했고, 당시 신민당 총재이던 김영삼은 노동자를 위로하며 박정희 정권과 맞섰다. 그 무렵 부산대에서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시위가 열렸고 이 시위는 시민들의 참여로 부산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러자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 강경 진압을 택하고 특전사까지 투입했지만 오히려 시위는 더 커져 이웃도시 마산으로 번졌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사태의 심각성을 박정희에게 알렸지만, 박정희는 발포권까지 언급하며 강경책을 고집했다. 결국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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