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6

2017.02.22

한창호의 시네+아트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들을 때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7-02-17 16:52:3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영화 제목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미국 북동부의 작은 어촌 이름이다. 아름다운 바다, 조그만 항구, 고기잡이배, 그리고 갈매기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다. 배에선 삼촌이 어린 조카를 상대로 “무인도에 간다면 아빠와 나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겠니” 같은 싱거운 농담을 던진다. 하늘은 넓고, 바다는 잔잔하며, 배는 부드럽게 파도를 넘어간다. 무척 평화롭게 보여 오히려 불안한 도입부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다 화면이 갑자기 바뀌며 하늘이 탁 트인 어촌 대신 건물들이 바짝 붙어 있는 도시 보스턴이 보인다. 웃고 떠들던 삼촌 리(케이시 애플렉 분)는 과묵한 표정으로 길가의 눈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며, 막힌 배관을 뚫는 등 온갖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 혼자 사는 잡역부로, 얼굴에 미소라곤 보이지 않는다. 겉모습만 봐서는 조카와 배를 탈 때로부터 세월이 제법 흐른 것 같은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리도 어두워졌을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보스턴의 고독과 고향 바다의 웃음 사이, 너무나 멀어진 간격을 이어주는 것으로 서사를 끌어간다. 리는 고향을 잊은 듯 살다 갑자기 형의 죽음을 통지받고 오랜만에 귀향 길에 오른다. 귀여웠던 조카 패트릭(루커스 헤지스 분)은 그사이 고교생이 됐다. 리는 졸지에 고아가 된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자 구실을 위임받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 일만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보호자가 없으면 조카가 고아원에 갈 수도 있는데, 대체 무슨 이유로 삼촌이 그 일을 거부하는 걸까. 이상하게 리는 ‘보호자(guardian)’라는 말에 대단히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베토벤의 ‘월광’처럼 너무 유명해 오히려 간과되는 작품인 것 같다. 바로크 특유의 비장함, 죽음의 고독, 죄의식, 종교적 회한 등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아다지오’는 웬만한 레퀴엠보다 더 무거우면서도 상처를 따뜻하게 위무하는 듯한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위무에 ‘아다지오’만큼 적절한 곡도 드물 것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리의 테마곡으로 쓰고 있다. 어느 한 부분만 발췌해 연주하는 게 아니라, 10여 분에 이르는 전곡을 들려주며 바로 그곳에 영화의 정점을 찍어놓았다. ‘아다지오’는 계속 들려오고, 그때 보호자가 되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리의 죄의식, 죽음의 비극, 돌이킬 수 없는 회한 등이 거의 침묵 속에서 음악으로 표현되는 식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미국 영화가 특히 강점을 갖고 있는 가족멜로드라마다. ‘가족’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행복, 상처, 위무 등의 복잡한 감정이 느린 ‘아다지오’ 속에 압축돼 표현되는 셈이다. 케이시 애플렉의 연기가 드라마의 긴장을 끌고 가는 데 큰 구실을 한다. 형 벤 애플렉이 주로 제도권 인물 연기로 사랑받는다면, 동생 케이시는 주변부 인물 연기에 남다른 실력을 보였는데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정점에 이른 것 같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