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9

2016.12.28

강유정의 영화觀

퀸카의 비밀, 씁쓸한 현실의 맛

홍덕표 감독의 ‘졸업반’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6-12-23 1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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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졸업반’ 앞에 붙는 홍보 문구다. 하지만 ‘졸업반’은 우리가 생각하는 졸업반의 낭만 정반대 편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졸업반’의 낭만은 어떤 것일까. 다시 못 볼 것을 마음 아파하며 급우나 은사님과 뜨거운 포옹을 하는 것? 아니면 밝은 미래를 향한 마지막 계단에서 비약하는 그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그림? 안타깝게도 ‘졸업반’은 연상호 감독이 제작한 연상호표 영화다. 연출을 맡은 홍덕표 감독은 어떤가. 두 사람이 호흡을 맞췄다는 건 이미 그 졸업반이 예사 졸업반이 아니라는 강력한 인장이자 증표다. 그리고 명실상부하게 ‘졸업반’에 그려진 현실은 씁쓸하고 아프다.

    시작은 고백이다. 있는 듯 없는 듯, 크게 무리하지도, 대단한 재능을 보이지도 않은 채 졸업반이 된 정우에겐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사람이 있다. 미술학과 퀸카, 주희다. 주희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실력도 출중하다. 학업에만 열중해 학과 남자아이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얼음 공주이기도 하다. 정우는 주희에 대한 마음을 비밀리에 연재 중인 자신의 만화에 상징적으로 고백해둔다. 순수미술이 전공인 그는 학과 친구들에게 두 개의 비밀을 가진 셈이다. 하나는 만화를 그린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비단 정우에게만 주희가 연모와 추앙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정우를 비롯한 학과 남자 동기들에게, 심지어 여자 후배들에게까지도 주희는 말 그대로 ‘워너비’ 이상형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빼어난 외모에 출중한 실력까지 겸비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친구의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려고 소위 ‘텐프로’가 일하는 업소를 찾아간 정우는, 그 뜻밖의 장소에서 주희를 만난다. 사실 주희는 유학비를 벌려고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졸업반’에 등장하는 주희는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빼어난 미모도 그렇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일을 택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주희는 유학의 꿈을 이루려고 아주 잠시 선택한 길이라고 말하지만 그 당돌한 선택이 당혹스럽기도 하다. 이 당혹감은 그를 사랑해온 정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우가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속하면서 이 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가는 듯싶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 비밀은 없다. 그 비밀이 사회적 위치의 갑이 아니라 을의 것일 땐 더욱 그렇다. 졸업 후를 위한 선택이 결국 주희의 졸업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사이비’ ‘돼지의 왕’ 등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 면이지만, ‘졸업반’은 이 사태를 둘러싼 미묘하고도 폭력적인 심리 변화와 역학관계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준다. 가령 갑자기 주희를 창녀 취급하면서 이용하려 드는 남학생들과 불결하다며 더 은밀한 방식으로 괴롭히는 여자 후배들처럼 말이다.



    정우 역시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추앙 받던 주희는 갑자기 배척되고 비난받으며 손가락질당하는 아이로 추락한다. 그를 향한 성적 학대와 언어폭력이 정의와 상식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딘가 씁쓸한 현실의 맛을 지울 수 없다. 모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우리가 간직한 순정이라는 것도 사실 유통기한이 지나치게 짧은 공산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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