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84

2019.04.12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머틀리 크루의 전기영화 ‘더 더트’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던 1980년대 헤비메탈 밴드의 초상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9-04-15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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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넷플릭스]

    [사진 제공 · 넷플릭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더 더트(The Dirt)’는 헤비메탈 밴드 머틀리 크루에 대한 전기영화다. 1981년 그들이 만났던 시절부터 1989년 최고 성공작 ‘Dr. Feelgood’까지, 1980년대를 관통하는 이 로큰롤 악당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보통 실존 인물, 그것도 생존해 있는 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미화와 분칠이 따르기 마련이다. 안 좋았던 일에 대해서는 왜곡 혹은 변명이 더해지고, 타인과의 분쟁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종종 뒤바뀐다. ‘더 더트’의 뛰어난 점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빈스 닐(보컬), 토미 리(드럼), 믹 마스(기타), 니키 식스(베이스) 등 멤버 전원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했음에도 이 영화는 그들의 젊은 날에 대해 일말의 미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마약과 섹스, 알코올과 온갖 사건·사고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니, 차라리 누가 더 막장이었는지 경쟁하는 듯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1980년대 로큰롤의 대표적인 악동, 머틀리 크루였으니까.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서방을 이끌던 냉전의 1980년대, 팝계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화려했다. 경제가 호황 일변도로 흐르면서 음악산업도 팽창했다. MTV가 등장하면서 음악은 듣는 매체에서 보는 매체가 됐다. 시작 단계의 필연적 현상이었을까. 모든 것이 과장 일변도였다. 누구나 사자 머리로 화면에 등장하고 원색과 형광색이 무대 의상의 주류를 차지하곤 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짙디짙은 색조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 

    헤비메탈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의 펑크와 글램 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새로운 록 키드들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일대에 등장했다.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여파로 미국 내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쳐나는 도시였다. 그들은 1970년대 하드 록에 펑크를 결합했고 그루브한 리듬을 더했다. 팝 풍의 멜로디로 대중성을 확보했다. 백인 10대를 겨냥한 음악답게 반항적 가사로 노래를 채웠다. 물론 사회·정치적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 섹스, 파티, 반기독교 등이 주였다. 저항의 깃발을 사회적 이슈에서 쾌락주의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 선봉에 머틀리 크루가 있었다.

    1980년대 좌충우돌 메탈의 대명사

    [사진 제공 · 넷플릭스]

    [사진 제공 · 넷플릭스]

    영화에서 묘사되는 머틀리 크루의 시작은 이렇다. 1981년 로큰롤 드러머를 꿈꾸던 토미 리가 결손가정 출신인 니키 식스를 만나 밴드를 결성한다. 그들은 오디션을 통해 노숙자 생활을 하던 믹 마스를 영입한다. 밴드의 얼굴이 될 만한 미남 보컬을 찾던 그들은 토미 리의 고교 동창이자 유원지 행사 밴드에서 활동하던 빈스 닐에게 합류를 제안한다. 그리고 믹 마스가 언젠가 자신이 밴드를 하게 될 날을 위해 아껴뒀던 ‘머틀리 크루’라는 이름을 짓는다. 원래는 ‘각양각색의 잡다한 선원들’이란 뜻의 영어표현 ‘motley looking crew’를 살짝 비틀고 유럽어처럼 보이게 하려고 ‘Mo‥tley Cru‥e’라고 이름 지었던 것. 



    대망의 첫 공연.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던 무대에서 딱 달라붙는 가죽바지와 화장한 얼굴로 정통 하드 록이 아닌 펑크에 가까운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이 풋내기들은 남자 관객들의 비웃음을 산다. 하지만 머틀리 크루 역시 비범해, 바로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가 그들과 난투극을 벌인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관객들은 새로운 ‘또라이’의 탄생에 열광한다. 자체 제작한 데뷔 앨범 ‘Too Fast For Love’에 담긴 ‘Live Wire’로 언더그라운드에서 승승장구하게 되고, 소문을 들은 워너뮤직 산하의 일렉트라 레이블과 계약을 맺는다. 

    이후 스토리는 전형적인, 화려하고 파괴적인 록스타의 생활이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마약과 술, 그리고 섹스 파티가 벌어진다. 새로운 친구가 이 파티에 초대돼 받는 ‘의식’은 테이블 아래 숨어 있던 그루피가 하는 오럴 섹스다. 대마초 정도는 마약 축에도 들지 않는다. 코카인을 거쳐 마침내 헤로인까지, 그들이 제정신인 날은 거의 없다. 약이건 술이건 그들은 늘 취해 있다. 

    오직 술만 가까이 했을 뿐 마약과 여자를 멀리한 믹 마스만 예외라면 예외다. 니키 식스는 토미 리의 결혼식에서 신랑 측 들러리를 서기로 했으나, 결혼식 당일에도 약에 취해 하마터면 밴드 멤버이자 ‘절친’의 중대사를 망칠 뻔한다. 프로필 사진을 찍는 것만큼 마약 관련으로 체포돼 머그 샷을 찍는 일도 다반사다.

    젊은 날의 쾌락은 먼지가 되고

    머틀리 크루의 실재 공연 모습. [위키피디아]

    머틀리 크루의 실재 공연 모습. [위키피디아]

    그들이 음악적으로 어떻게 성공했는지보다 부와 인기가 쌓일수록 심화되는 쾌락에 대한 탐닉으로 러닝타임을 채우는 영화가 변화되는 시점은 머틀리 크루가 ‘Home Sweet Home’이라는 첫 발라드 히트곡을 낸 1985년 이후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호텔에서 파티를 즐기던 빈스 닐은 떨어진 술을 사려고 차를 몰고 시내로 향한다. 물론 술에 잔뜩 취해서. 당연히 큰 사고가 난다. 운 좋게도 그는 살아남았지만 옆자리에 타고 있던 다른 밴드의 드러머는 즉사한다. 빈스 닐은 체포되지만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빈스 닐은 술과 마약을 끊는다.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급성심장마비로 죽을 뻔한 이후 니키 식스 역시 마약을 끊는다. 이러다가는 단체로 요절하겠다고 여겼는지, 결국 전원이 재활치료를 받는다. 

    그리고 데뷔 이래 처음 맨 정신으로 작업한 다섯 번째 앨범 ‘Dr. Feelgood’은 밴드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빌보드 정상에 오른다. 하지만 성공 뒤의 어둠은 이번에도 따라왔다. 이 앨범의 세계적인 히트로 최대 규모의 월드투어에 나서지만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향수병도 짙어졌다. 술과 마약을 끊었으니 스트레스를 풀 곳도 마땅치 않았다. 

    진작에 가정을 꾸리고 있던 빈스 닐은 이로 인해 결국 밴드를 떠난다. 1992년 록의 패러다임이 헤비메탈에서 얼터너티브로 바뀐 후였다. 머틀리 크루의 전성기도 끝났다. 1980년대가 ‘과거’로 편입된 2000년대 중반, 그들은 다시 한 번 뭉치고 2015년 투어를 끝으로 완전히 해체한다. 

    어지간한 다큐멘터리보다 솔직하고 적나라한 이 영화는 1980년대를 통해 현재의 대중문화를 되짚게 한다. 술과 마약, 섹스 가운데 술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랑스럽거나 당연했던 지위를 상실했다. 쾌락주의를 ‘정치적 올바름’, 마초이즘을 페미니즘이 대치했다. 록은 거대 산업의 자리를 힙합과 EDM에 내줬다. ‘더 더트’는 마치 무협지와도 같았던, 파괴적이고 위험했지만 내일이 없는 즐거움으로 넘쳐났던 시대의 초상화다. 그래서 그때가 좋았느냐고? 영화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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