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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무영 왔다 감, 지성 왔다 감

뮤지컬 ‘그날들’

무영 왔다 감, 지성 왔다 감

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관객이 공연장에서 작품과 배우를 자세히 보려고 ‘오페라글라스’를 쓰는 것처럼 공연 속 티끌만 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자 ‘오타쿠글라스’를 씁니다.


[홍태식]

[홍태식]

수천 가닥의 실로 된 커튼과 거기 투영되는 신비로운 영상. 뮤지컬 ‘그날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국내 창작 뮤지컬 가운데 ‘그날들’은 꽤나 성공한 작품으로 꼽힌다. 작품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20년 전 ‘그날’의 미스터리한 사건을 고(故) 김광석이 부른 주옥같은 노래들과 함께 그려낸다. 2013년 초연 당시 모든 뮤지컬 시상식을 휩쓸며 흥행과 비평 면에서 성공을 거뒀다. 감각적인 연출, 다양한 편곡, 애크러배틱과 무술을 접목한 화려한 군무 등이 특징이다. 

작품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이야기하고 싶을 때 매출 말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캐스팅 변화를 들 수 있다(물론 국내에서 두 차례 이상 공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성공한 작품이라는 방증이다). 올해로 5번째 무대에 오르는 ‘그날들’에 캐스팅된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스테디셀러가 된 작품이 배우를 캐스팅할 때 어떤 모험을 하고 어떤 부분을 신경 쓰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어느 정도 초기 자본을 가지고 시작하는 창작 뮤지컬이라면 흥행을 위해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게 마련이다. ‘그날들’은 한국 감성에 맞춘 창작 뮤지컬을 잘 뽑아내기로 유명한 연출가 장유정의 작품이다. 장 연출은 이 작품에 대해 “인생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고비를 맞이하는데 그때마다 아름다운 위로를 준 곡이 김광석의 노래들이었다. 세상을 일찍 떠나버린 그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지켜주지 못한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작품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날들’의 성공 공식

[사진 제공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사진 제공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장 연출은 ‘김종욱 찾기’와 ‘형제는 용감했다’ 등 성공한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낸 미다스의 손이다. 두 작품 모두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그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 제목은 ‘김종욱 찾기’(2010)와 ‘부라더’(2017). 여기에 ‘싱글즈’ ‘형제는 용감했다’ ‘피맛골 연가’ 등의 작곡을 맡은 장소영 음악감독이 협심해 ‘그날들’을 완성했다. 장 음악감독은 “통기타 선율을 바탕으로 담담하게 불러 내려가는 게 김광석 노래의 특징인데, 많은 이가 기억하는 원곡 느낌을 살리면서 더욱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편곡에 많이 신경 썼다”고 밝혔다. 



2013년 ‘그날들’ 초연 캐스팅으로 돌아가보자. 청와대 경호부장이자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인 차정학 역에는 유준상, 오만석, 강태을, 경호관 동기이자 여유와 위트를 지닌 자유로운 영혼 강무영 역에는 최재웅, 지창욱, 오종혁 등이 캐스팅됐다.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배우들과 팬덤이 탄탄한 배우를 두루 ‘모셔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 듣기만 해도 묘한 가을 감성에 젖어들게 하는 김광석의 명곡 퍼레이드가 펼쳐지니 반칙인 셈. 예상대로 작품은 성공을 거뒀다. 여성 관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뮤지컬계에서 드물게 남녀노소 함께 즐겨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이 성공한 이후 ‘그날들’은 무영 역에 아이돌 출신 배우들을 하나씩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팬에게는 좋아하는 가수가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고, 뮤지컬 팬에게는 뉴페이스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2014년에는 슈퍼주니어 멤버 규현, 2016년에는 FT아일랜드 멤버 이홍기, 2017년에는 하이라이트(옛 비스트) 멤버 양요섭이 무영 역을 맡았다. 올해는 인피니트 남우현과 워너원 출신 윤지성이 무영 역으로 자리를 채웠다. 

이번 시즌에는 정학 역에 유준상, 이필모, 엄기준, 최재웅, 무영 역에 오종혁, 온주완, 남우현, 윤지성이 나온다. 그들이 경호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녀 역은 최서연과 제이민이 연기한다. 유준상과 오종혁은 초연에 이어 이번에도 같은 역을 맡았다. 초연 때 무영으로 출연한 최재웅은 재연과 이번 시즌에서 정학 역을 맡아 초연을 본 골수팬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이렇듯 오래 공연한 작품은 새로운 ‘셀링 포인트’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날들’은 이번 시즌 무영 역으로 윤지성을 캐스팅하면서 그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2월 26일 열린 프레스콜에 공연 담당 기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은 취재진이 찾은 것은 이제 막 1년 6개월간의 아이돌(워너원) 활동을 마치고 가수 겸 배우로 날갯짓을 시작한 윤지성에 대한 관심이 작용했기 때문일 테다. 

윤지성은 프레스콜에서 ‘말하지 못한 내 사랑’과 ‘먼지가 되어’를 불렀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잘한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장면 장면을 짤막하게 보여주다 보니 호흡이 짧기도 하고 긴장한 기색도 역력해 마치 뮤지컬 버전 ‘프로듀스 101’ 오디션을 생방송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 뮤지컬 무대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던 그는 “워너원 활동 종료 후 좋은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다. 멋진 선배들과 공연할 수 있어 가슴 벅차고 설렌다. 가수로 보여준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아이돌 윤지성의 뮤지컬 도전

[사진 제공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사진 제공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학창 시절부터 뮤지컬 무대를 동경해온 윤지성. ‘워너원 리더 윤지성’이나 ‘솔로 가수 윤지성’이 아닌 ‘뮤지컬 배우 윤지성’을 제대로 평가하고 싶어 3월 13일 낮 공연을 다시 찾았다. 공연이 열리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지하의 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에는 워너원 활동 당시 윤지성의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꾸며놓은 일명 ‘윤지성 존(zone)’이었다. 이날 캐스팅은 최재웅 정학과 윤지성 무영. 어떤 작품에서 만나도 실망시키지 않는 최재웅이었기에 ‘초짜 배우’ 윤지성을 잘 리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날 윤지성은 ‘아, 노래뿐 아니라 연기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영 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모습이었다. 확실히 프레스콜 때 떨었던 게 틀림없었다. 능청스러운 연기와 개그, 슬랩스틱도 곧잘 소화했고, 주요 넘버를 애절하게 소화하는 장면에서는 한 중견 기자의 말처럼 “솔로 앨범 활동을 하면서 무대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은 대견함”마저 느껴졌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아직 가요식 발성을 벗어나지 못한 건 단점이었으나 그건 뮤지컬에 도전하는 아이돌이라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다. ‘뮤지컬 무대’가 누군가에겐 ‘일탈’이나 ‘외도’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생업’이니 말이다. 보통은 이 단점을 어떻게 보완하느냐에 따라 배우로서 수명이 달라진다. 그가 출연하는 회차가 ‘팬들만 보는 회차’가 될지, ‘팬들도 보는 회차’가 될지는 전적으로 윤지성 자신에게 달린 셈이다. 그가 배우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워너블에게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재미를 줄 것이다. 


[홍태식]

[홍태식]

앞서 그의 팬에 빙의해 무대를 평가했다면 이번에는 ‘뮤덕’(뮤지컬 덕후)의 눈으로 무대를 평가할 차례. 만약 뮤지컬 ‘그날들’을 처음 보는데 무영 역 때문에 고민이라면 걱정 말고 선택해도 좋다고 말해줄 것 같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중년과 청년 시절을 수시로 오가는 정학과 달리 무영은 젊은 시절, 과거 모습만 나오기 때문에 연기로 거슬리는 부분은 크게 없었다. 음색은 취향 차이가 크니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목소리만 놓고 보면 김광석의 노래와도 꽤 잘 어울렸다. 

초연이나 재연을 보고 이번 시즌 역시 공연장을 찾을 예정이라면 바뀐 부분도 알고 가자. 이번 시즌에는 작품의 메인 스토리 라인인 정학과 무영, 그녀의 이야기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고자 서브 스토리 라인을 과감하게 생략했기 때문. “생략한 넘버 대신 캐릭터의 관계도를 명확하게 해주는 장면을 삽입해 작품 이해도를 끌어올렸다”는 게 제작사 측의 설명이다. 풍성한 음악을 위해 오케스트라도 12인조에서 15인조로 확대 편성했고, 안무와 액션도 한층 더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바뀌었다. ‘회전문러’라면 지난 공연과 달라진 부분을 찾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초연과는 또 다른 재미

[사진 제공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사진 제공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2012년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인 청와대. 경호부장이 된 정학에게 20년 전인 1992년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행방불명된 대통령의 딸과 그의 경호관을 찾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정학은 20년 전 사라진 무영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다. ‘무영 왔다 감, 그녀 왔다 감’이라는 낙서와 암호 같은 말들. 그리고 이 말들이 그를 과거로 되돌려놓는다. 과연 이 작품을 통해 윤지성은 ‘지성 (이번 한 번만) 왔다 감’이라는 메시지를 남길지, (최)재웅이나 (오)종혁, (유)준상처럼 ‘여러 번 왔다 감’이라는 메시지를 남길지 자못 궁금해진다.






주간동아 2019.03.29 1182호 (p72~75)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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