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음담악담

한국 버스킹의 조상들

‘오! 부라더스’ ‘윈디시티’ 그리고 ‘가면 쓴 하림’

  • 입력2018-10-15 11: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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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부라더스 [사진 제공 · 카바레 사운드]

    오! 부라더스 [사진 제공 · 카바레 사운드]

    공연은 밤의 전유물이었다. 지하실 라이브 클럽의 이벤트였다. 낮, 그리고 거리에서 열리는 공연은 무척이나 희귀했다. 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마저도 민원과 싸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낮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거리는 대체로 조용했다. 그 평화로운 정적의 시공간을 음악으로 물들이는 이들이 나타난 건 21세기와 함께였다. 아직 버스킹이라는 말도 낯선 시절이었다. 단순하게, ‘거리 공연’이라고 불렀다. 정직한 이름, 정직한 시간이었다. 정직하게, 버스킹 조상들이 태어났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은 인디음악계에 여러 장르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그중 ‘오르가즘 부라더스’라는 밴드가 있었다. 벤처스, 비치 보이스, 초기 비틀스 스타일의 복고적 로큰롤과 서프 뮤직을 하는 팀이었다. 아예 ‘댄스’를 표방한 그들은 홍대 앞 스팽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장르는 특이했지만 장소는 평범했다. 

    그들이 정체성을 획득한 건 1999년 여름 어느 주말이었다. 올리브 베이커리(현 클럽 할렘 근처) 주차장에 작은 앰프와 드럼을 놓고 연주를 시작한 것이다. 배경음과 소음 사이의 적당한 볼륨으로 연주된 그들의 첫 곡은 ‘전국노래자랑’의 메인 테마였다. 이를 시작으로 행인을 불러 모았다. 음악을 찾아 홍대 앞까지 온 이는 물론이고 지나가던 신사 숙녀들도 호응했다.

    춤바람과 희망의 느낌표

    그즈음 그들의 이름은 ‘오! 부라더스’로 바뀌어 있었다. 오! 부라더스는 주말마다 같은 곳에서 공연했다. 비치 남방을 입고 연주하는 1950~60년대 로큰롤은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갔다. 밴드 음악을 낯설어하는 사람도 스텝을 밟게 했다. ‘쌩’으로 연주되는 트위스트에 춤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직은 조용하고 한적한 홍대 앞의 주말 낮에 그들의 음악은 청량감을 더했다. 작은 앰프와 드럼에서 나오는 멜로디와 리듬은 무료한 공기에 설렘을 얹었다. 홍대 앞 최초의 버스킹이 탄생한 여름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홍대 앞 풍경을 상전벽해처럼 바꿔 놓은 이벤트였다. 이 시기를 즈음해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 걷고 싶은 거리가 조성되고 6호선 상수역이 뚫렸다. 일렉트로닉 음악 마니아의 행사 같던 ‘클럽 데이’가 대박을 터뜨리며 사람들의 동선을 바꿨다. 서울 서북부 상권의 중심이 신촌에서 홍대 앞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된다는 느낌이었다. 그 전과는 다른 활력이 흐르고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라이브 클럽보다 댄스 클럽으로 향하는 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던 그때 주말, 해질녘의 거리에선 드럼 비트가 울렸다. ‘김반장과 윈디시티’의 공연이었다. ‘Think About’Chu’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아소토 유니온’을 해체한 김반장의 새 밴드 윈디시티는 라이브 클럽이 아닌 거리를 주 활동 무대로 택했다. 

    현재 삼거리포차 자리에 있던 작은 헤나숍 앞에 드럼 세트를 설치하고 흑인 음악의 명곡들과 자작곡을 연주했다. 인도, 네팔 등의 전통의상을 입은 일군의 남녀가 그 앞에서 바람잡이를 했다. 점점 사람이 늘어났고 춤판도 커졌다. 미군이 아닌 외국인도 홍대 앞으로 급속히 유입되던 때였다. 색소폰을 들고 그들과 잼을 하더니, 언젠가부터 아예 주말마다 함께 공연하는 외국인도 생겨났다. 

    한창 트랜스가 유행하던 당시 댄스 클럽가에서는 들을 수 없는, 심지어 힙합 전문을 표방한 클럽에서도 들을 수 없는 날것의 그루브가 생생하게 거리에 울렸다. 록이 주요 장르이던 라이브 클럽 대신, 춤을 갈망하는 21세기 청춘을 위해 거리에서 드럼을 연주한 김반장의 선택은 새로운 세기의 홍대 앞에 찍는 희망의 느낌표였다.

    하얀 가면 쓴 신비로운 악사

    하림 [동아DB]

    하림 [동아DB]

    2000년대 중반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던 주말 저녁, 홍대 앞 수노래방 사거리 한구석에는 그가 뽑아내는 신기한 멜로디가 흘렀다. 그는 언제나 하얀 가면을 쓴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악기들로 들어본 적 없는 이국적 음악을 연주했다. 마치 무심히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 자리에 앉아 악기를 연주한 후 사라지곤 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도 신비로웠지만, 그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가 연주한 악기는 대략 이렇다. 아이리시 틴 휘슬, 부주키, 드렐라이어, 니켈하르파…. 낯선 이름일 테다. 기억도 못할 것이다. 유럽 전통악기들이다. 장담컨대 이렇게 많은 생소한 악기들을 국내에서 연주한 이는 그가 처음일 것이다. 

    흰 가면의 사내는 세계 여행을 다니며 악기를 모았고, 독학으로 연주법을 익혔다. 주말에 가면을 쓰고 나타나 혼잡한 거리를 정화했다. 유흥의 공간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대부분 그를 힐끗 보고 갈 길을 갔지만, 그래도 어떤 이들은 먼발치에서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우연히 그와 마주치게 되면 누군지 묻고 싶었다. 보통 사람은 아닐 터. 가면 뒤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그럴 시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가면의 사내가 만드는 시간은 경건했다.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홍대 앞 거리에 선사하는 제례의식처럼 느껴졌다. 

    그의 정체를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수 하림이었다. 2집을 끝으로 세계 여행을 다니며 각국 민속음악에 심취했던 그가 자신이 모은 악기로 버스킹을 했던 것이다. 언젠가를 끝으로 거리 공연을 멈춘 하림은 그 대신 카페에서 음악 친구들과 연주를 하곤 했다. 공연 형태가 아닌, 자연발생적인 음악의 시간이었다. 

    김반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윈디 시티 [동아DB]

    김반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윈디 시티 [동아DB]

    가장 경계하는 말이 있다. “지금은 다 망가졌어”라는 말이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다. 지금의 버스킹은 그때의 버스킹과 다르다고. 어느 누구도 노래방을 놔두고 거리에서 인기 가요를 부르며 마이크를 들지 않았다. 실력을 증명하는 공간이 아닌, 연마하는 공간으로 거리를 생각지 않았다. 버스킹 문화가 발달하고 그 나름의 규율이 있는 외국에서 받은 감정을 간헐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홍대 앞이었다. 버스킹의 지옥이 돼버린, 걷고 싶은 거리를 걸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활기와 안온함, 설렘을 떠올리곤 한다. 오! 부라더스와 김반장과 윈디시티, 가면 쓴 하림이 만들어내던 주말의 거리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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