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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자기가 만든 노래를 직접 부르고 연주하면 그게 바로 인디

4세대를 맞는 한국 인디 음악사

자기가 만든 노래를 직접 부르고 연주하면 그게 바로 인디

한국 인디 1세대 노브레인. [뉴시스]

한국 인디 1세대 노브레인. [뉴시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음악은 산업과 예술이라는 양면적 속성을 갖고 있다. 대중 취향에 맞는 기획과 마케팅을 통해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산업적 측면이요, 창작자 욕구를 음악으로 표현해 미학적 성취를 일궈내는 것이 예술적 측면이다. 이 두 속성은 대체로 공존하지만 그 비중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산업적 가치의 극단을 추구하는 건 아이돌이다. 아이돌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장에서 성공’이다. 재능은 있되 대중적 인지도가 전혀 없는 멤버들이 이 시스템을 거쳐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트레이닝 시스템과 홍보력, 자본이 투하된다. 이 과정에서 멤버들의 ‘자아’는 중요하지 않다. 대중이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유명 프로듀서의 곡으로 데뷔시켜 최대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윤 추구가 산업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환기해보라. 

그 반대 축에 ‘인디’가 있다. 이 땅에 인디라는 말이 등장한 지 20여 년이 됐고 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자기가 만든 노래를 직접 부르고 연주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원하는 대로 표현하는 것. 인디 음악에 대한 쉬운 부연이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조용필은? 서태지는? 그들이야말로 아티스트의 표상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디라는 말을 썼다. 현 시점에서 인디는 과거 ‘언더그라운드’와 일맥상통하는 의미다. 대중에게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음악 또는 예능프로그램보다 공연이나 온라인을 통해 주로 활동하는 음악가 말이다.


‘홍대 앞’에서 잉태되다

한국 인디 2세대 루시드폴(왼쪽)과 3세대 국카스텐. [뉴시스, 사진 제공·인터파크]

한국 인디 2세대 루시드폴(왼쪽)과 3세대 국카스텐. [뉴시스, 사진 제공·인터파크]

한국에 인디라는 개념이 들어온 건 1990년대 후반이다. 당시 팝계는 유니버설, EMI, 소니 등 대형 음반사의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 음악적 자유를 유지한 채 자체적으로 음반을 유통하는 회사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너바나, 펄 잼 등이 그런 음반사에 소속돼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음반사를 사람들은 ‘독립 음반사(independent label)’라 불렀고, 이를 줄여 인디(indie)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이 한국에 전파될 무렵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에는 새 물결이 일고 있었다. 바로 서울 홍대 앞이 새로운 음악의 산실이 된 것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본산은 신촌과 이태원이었다. 헤비메탈과 블루스 등이 주요 장르였다.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신촌이 과밀화되면서 임대료는 치솟고 거리는 번잡해졌다. 과거 신촌 문화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홍대 앞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하드 록과 헤비메탈 대신 얼터너티브와 펑크 등 당시로서는 최신 음악이 흐르는 그곳에 역시 그런 음악을 좇는 이들이 모여 들었다. 지금의 경리단길, 망원동처럼 새롭게 뜨는 동네가 그때의 홍대 앞이었던 셈이다. 

비슷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그 음악을 하고 싶은 법. 원래 음악 술집이던 ‘드럭’ ‘스팽글’ 같은 곳에서 공연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곳 ‘죽돌이’들이 밴드를 만들고 역시 단골손님을 대상으로 무대에 섰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등 이른바 ‘인디 1세대’의 탄생이었다. 

홍대 앞 밴드들은 그 전의 헤비메탈 밴드와 여러모로 달랐다. 단지 장르뿐 아니라, 활동하는 태도의 차이였다. 그들은 유명 곡을 카피하는 대신 처음부터 자작곡 위주로 공연했다. 관객 역시 카피곡보다 자작곡에 더 큰 반응을 보였다.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델리스파이스의 ‘차우차우’ 같은 노래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언론은 이 새로운 흐름에 주목했다. 새로운 지역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음악, 거기에 ‘새로운 비주얼’이 있었다. 긴 머리와 가죽점퍼 대신, 뾰족뾰족 세운 머리에 염색을 하고 광장시장에서 산 구제 옷에 체인을 매달고 다니는 홍대 앞 스타일은 ‘그림’도 ‘이야기’도 됐기 때문이다. ‘홍대 앞’이 아니면 문화부 기자들이 쓸 거리가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연일 언론에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디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한국 인디의 출발이었다. 

1세대 등장 이후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홍대 앞 모습도, 음악의 흐름도 계속 바뀌었다. 2002 한일월드컵을 기점으로 라이브 클럽 대신 댄스 클럽이 홍대 앞 상권의 주도권을 잡았다. 주택가 골목골목에 카페가 속속 들어섰다. 음반시장이 몰락하면서 기존에 라디오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도 라이브 클럽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펑크와 얼터너티브가 중심이던 인디에도 다양한 장르가 출연하기 시작했다. 루시드폴, 허밍 어반 스테레오 등 포크부터 라운지까지 여러 색채의 음악이 꽃처럼 만개한 것이다.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등 대형 음악축제가 생겨난 것도 그들의 활동 무대를 넓히는 요소였다.


대중음악 다양성의 보루

한국 인디 4세대 볼빨간사춘기. [뉴시스]

한국 인디 4세대 볼빨간사춘기. [뉴시스]

2000년대 후반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검정치마, 브로콜리 너마저 같은 신예가 등장했다. 이들은 다시 한 번 커다란 파도를 만들어냈다. 인디 르네상스로 불리기 충분했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을 바꿔놓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인디는 과거 마니아적 음악에서 라디오, 공연 친화적 음악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공격적 성향 대신 따뜻한 소리가 주를 이룬다. 최근에도 볼빨간사춘기, 신현희와김루트, 멜로망스, 혁오 등의 뮤지션이 차트를 누빈다. 스마트폰의 플레이 리스트 한 구석을 당당하게 차지한다. 주말마다 열리는 각종 음악 페스티벌 무대를 채운다. 활동무대도 홍대 앞을 넘어 방송을 비롯해 전국 각지 축제를 누비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발견’되는 음악은 아이돌보다 자기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다. 

이런 음악가의 존재는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책임진다. 아이돌이 어느 순간부터 케이팝(K-pop)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난 이후 한국 대중음악은 내수 상품에서 수출 상품이 됐다. 케이팝이 해외시장을 활보할수록, 음악을 하려는 어린 친구들은 기획사에 들어가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디 음악, 즉 자신의 음악을 자기 감성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그 착각을 막아준다. 새로운, 그리고 다른 꿈을 꾸게 해준다. 미국 영화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뿐 아니라 선댄스 독립영화도 존재하기에 산업적, 예술적 상상력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화적으로 풍성한 사회에 필요한 건 언제나 더 많은 다양성이다. 대중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주간동아 2018.06.27 1144호 (p76~77)

  •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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