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1

2018.06.06

황승경의 on the stage

소시민의 화해를 위한 연대 의지

연극 | ‘페스트’

  • 입력2018-06-05 13: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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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국립극단]

    [사진 제공·국립극단]

    14세기 갑작스러운 페스트 창궐로 굳건하던 유럽 봉건제도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페스트는 오한을 동반한 고열이 나면서 피를 토하거나 의식을 잃고 24시간 내 죽는 끔찍한 병이었다. 죽기 전 온몸이 검게 물들어 흑사병(黑死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유럽인은 페스트 발병을 막고자 미신에 의존하거나 종교로 도피했다. 정작 중요한 의료환경이나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등은 바꾸려 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유럽에는 치명적인 역병이 종종 발생했지만 이처럼 빠른 시간에 전 유럽을 처참하게 강타하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경우는 드물었다.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로 노동 가치는 상승한 반면, 종교 위상은 급격히 추락해 결과적으로 유럽은 새로운 변화 국면을 맞이한다. 이후 유럽은 3세기가 지나서야 발병 이전의 인구수를 만회할 수 있었다. 

    1939년 9월 탱크부대를 앞세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신문사 기자 알베르 카뮈(1913~60)는 전쟁의 참상이 페스트의 참혹한 위력과 같다는 점을 깨닫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페스트’를 출간한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사회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페스트의 위력에 맞서 싸우는 것은 권력도, 종교도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인간애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진 제공·국립극단]

    [사진 제공·국립극단]

    70여 년 뒤인 2018년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에 맞게 각색된 연극 ‘페스트’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섬은 꽤 오랜 시간 거대한 장막으로 가로막혀 있고 페스트로 하나 둘 쓰러져가지만,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섬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연출자 박근형은 소설 속 무대였던 ‘오랑’을 한반도로, ‘장벽’을 휴전선으로 전이해 분단의 낡은 이념이 만든 증오를 극복하려는 화해 의지를 연극에 담았다. 박근형의 미학은 박상봉의 감각적 무대와 타루 역을 맡은 배우 이원희의 비극적 피아노곡으로 빛을 발했다. 세상의 변화는 권력자나 성직자, 지식인이 만드는 게 아니라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소시민의 화해를 위한 연대 의지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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