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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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선거? 차라리 제비뽑기는 어떨까

추첨 민주주의 가능케 하는 스마트폰  …  아이슬란드, 아르헨티나 이미 시작

  • 지식 큐레이터 imtyio@gmail.com

    입력2017-05-02 18: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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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인은 자신을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의원을 뽑는 선거기간뿐이다. 일단 의원이 선출되면 영국인은 노예가 된다.”

    5월 9일 ‘장미 대선’이 열흘여 앞으로 다가왔다. 몇 차례에 걸친 대선후보 TV토론을 볼 때마다 장 자크 루소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지금 한 표를 읍소하는 저들이 과연 지금 약속한 대로 공익을 실천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저들이 과연 저런 중책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이 대목에서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문다. 선거 때마다 누군가를 뽑고, 몇 달 혹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실망하는 패턴이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여기서 발상의 전환을 해볼 수는 없을까. 혹시 우리가 표를 주는 ‘정치인’이 아니라 ‘선거’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직접 민주주의’는 없었다

    여기서 상식부터 점검하자. 고대 아테네의 정치체제는 흔히 현대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꼽힌다. 어렸을 때부터 교과서에서 이렇게 배웠다. ‘고대 아테네는 애초 직접 민주주의였다. 여성, 노예, 외국인 등은 의사결정 과정에 낄 수 없었지만 성인 남성은 직접 아테네의 대소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런 직접 민주주의는 현대에 와서 대의 민주주의로 바뀌었고….’



    프랑스 정치학자 버나드 마넹의 저서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는 이런 상식을 깬다. 당시 여성, 노예, 외국인 등을 제외한 아테네 전체 시민은 3만 명 정도였다. 그런데 아테네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민회의 의석은 6000석이었다. 당시에도 전체 시민의 5분의 1 정도만 모여 정치를 했다. 아테네 민주주의도 직접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 민주주의였던 것.

    놀랄 일은 더 있다. 민회는 아테네 시민의 자원으로 꾸려졌다. 그런데 민회에 법안을 제출하는 500인 평의회(입법부), 지금의 법원과 헌법재판소 기능을 결합한 시민 법정(사법부), 약 600명의 행정관(행정부)은 몽땅 제비뽑기로 뽑았다. 군사, 재무 담당 등 소수 전문가 100명 정도만 선거로 선출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제비뽑기, 즉 ‘추첨 민주주의’가 있었다. 왜 선거가 아닌 추첨이었을까. 아테네 사람도 알았던 것이다. 선거를 하면 유력 가문 출신의 정치인,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인기인, 돈 많은 사람 등이 대표 자리를 모조리 차지하리라는 사실을!

    아테네가 선택했던 제비뽑기 혹은 추첨 민주주의의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선거 대신 제비뽑기로 국회의원 같은 대표를 뽑자는 것이다. 벌써부터 반론이 들린다. ‘그러다 아무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어?’ 그런데 바로 그 ‘아무나’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민주주의 아니었나.

    지금은 제도로 정착된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할 때도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법을 모르는 일반 시민이 판결에 참여하는 게 문제라다는 반론이었다. 하지만 2008년 도입한 국민참여재판 제도를 보면 배심원 판결과 판사 판결이 91% 정도 일치한다. 오히려 2심 파기율은 판사만 결정한 재판이 더 높다.

    더구나 지금 선거로 뽑는 각종 대표(국회의원, 대통령 등)가 과연 얼마나 훌륭한 식견과 전문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4년마다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연예인, 언론인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이들이 선거로 국회의원 등이 되지만 그들도 (자기 분야를 벗어난) 경제, 복지, 남북문제 등 한국 사회의 복잡한 현안 앞에서는 그저 ‘인턴 국회의원’일 뿐이다.



    제비뽑기  +  스마트폰, 세상이 바뀐다

    대한민국에서 추첨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물론 여기는 3만 명 정도가 지지고 볶던 고대 아테네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고대 아테네 사람에게 없었던 게 있다. 바로 나이, 성별, 소득,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손에 쥐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그것이다. 이미 스마트폰으로 정치를 바꿔보려는 시도가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실험은 2012년 아르헨티나에서 개발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데모크라시(Democracy) OS’다. 산티아고 시리, 피아 만시니 같은 2030세대가 중심이 돼 만든 데모크라시 OS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지역구 의원이 제출한 법안에 의견을 개진하고 찬반투표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앱이다.

    기성 정치인의 호응이 없자 이들은 2013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회 선거에 새로운 정당(Partido de la Red)으로 참여해 1.2%를 득표했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면서 데모크라시 OS는 아르헨티나를 넘어 전 세계 곳곳에서 각종 정책이나 법안을 심사하고 찬반투표를 진행하는 플랫폼으로 활용되고 있다.

    추첨 민주주의와 데모크라시 OS 같은 기술이 결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선거로 뽑은 국회의원 300명에 더해 제비뽑기로 뽑은 시민의원 600명으로 시민의회를 구성했다 치자. 그리고 이들에게 데모크라시 OS 같은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정부나 국회에서 제안한 법안을 심사하고 찬반투표를 하는 권한을 부여하자.

    상상만 해도 즐겁다. 평생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들어갈 일 없는 학생, 교사, 농민, 노동자, 상인, 미화원 등이 각종 법안을 심사하고 찬반투표를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들썩거리지 않을까. 당장 돈도 많고 힘도 세서 공무원, 정치인을 주물럭거려온 일부 권력집단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꿈같은 얘기라고? 시야를 넓혀 보면 그렇지 않다. 2008년 금융위기로 경제가 파탄 난 아이슬란드는 2010년 헌법을 개정하고자 시민의회를 구성했는데, 인구에 비례해 의원 950명을 제비뽑기로 뽑았다. 아일랜드에서는 2013년 1년 동안 시민 66명을 제비뽑기로 뽑아 정치인 33명과 함께 헌법 8개 조항을 검토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한국에서 추첨 민주주의를 알리는 데 앞장선 이지문 박사는 지방의회부터 제비뽑기 방식으로 구성해보자고 제안한다. 듣고 보니 솔깃하다. 지역 출신 50대 이상 아저씨의 사랑방이 되기 십상인 지방의회에 스마트폰 앱으로 무장한 20대 대학생, 30대 아줌마가 등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만 해도 어깨가 들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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