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커 프로젝트

책의 밀림 속으로 파고든 책벌레를 형상화하다

헌책 17만 권을 재배하는 지식의 온실, 서울책보고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6-1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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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소 서울 송파구 신천동 14

    • 준공 2018년 12월

    • 설계 서현·삼정이엔씨·창조AD건축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6월 초 서울책보고를 찾아갔을 때 세 번 놀랐다. 

    첫째, 교통 근접성이 매우 좋았다. 서울지하철 2호선 잠실나루역에서 내리면 1분 거리에 위치한다. 신천유수지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한강공원으로 이어진다. 

    둘째, 외관만 보면 너무 허름하다. 양철천장에 양철벽으로 지어져 컨테이너박스 서너 개를 붙인 듯하다. 원래 한국암웨이가 창고로 빌려 쓰던 공간을 땅주인인 서울시가 자체 충당할 수 있는 최대 예산인 30억 원 내에서 개조해야 했기 때문. 그나마 통유리로 된 외벽 유리창에 붙은 ‘가정의 달’ 기념 대형 걸개그림이 이곳이 창고가 아니라 서고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서울책보고 내 32개 대형 철제 서가의 조감도.

    서울책보고 내 32개 대형 철제 서가의 조감도.

    셋째, 건물 동편에 위치한 정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왼편으로 길게 펼쳐진 압도적인 공간구성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가운데 아치형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대형 철제 서가가 켜켜이 펼쳐진다. 숫자를 세보니 32개나 된다. 

    1~4 서울책보고에 전시 중인 다양한 희귀본들. 고우영 만화 삼국지 초판본 한 질(전 10권)은 가격이 200만 원이나 된다. [지호영 기자]

    1~4 서울책보고에 전시 중인 다양한 희귀본들. 고우영 만화 삼국지 초판본 한 질(전 10권)은 가격이 200만 원이나 된다. [지호영 기자]

    가만 보면 가운데 아치형 통로는 일직선으로 나 있는 게 아니라 살짝 커브를 이루며 굽이친다. 그래서 깊은 숲속에 들어온 느낌을 부여한다. 높낮이도 커졌다 작아졌다 다시 커지기를 반복하며 굴곡을 만든다. 지름 기준으로 최소 2.8m에서 최대 6.1m까지 차이가 난다. 그에 맞춰 좌우 서가 높이도 2.4~4m 사이를 오가며 웨이브를 이룬다. 이 때문에 마치 고래 배 속에 들어간 히브리 성경 속 요나나 천일야화 속 신드바드가 된 기분이 들 정도다. 



    “2015년 기본 설계를 맡은 뒤 예산 문제로 네 차례나 설계 변경을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이미지가 책벌레였어요. 저 자신도 그렇지만, 헌책방 단골은 대부분 책벌레잖아요. 그래서 책 속을 파고드는 책벌레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집중했죠.”

    서울책보고의 회색빛 철제 서가 옆의 총천연색 출구들. [지호영 기자]

    서울책보고의 회색빛 철제 서가 옆의 총천연색 출구들. [지호영 기자]

    대형 철제 서가와 수직축을 이루는 열람실을 겸한 다목적홀. 벽면 서가에 전시된 책들은 독립서점들의 책이다. [지호영 기자]

    대형 철제 서가와 수직축을 이루는 열람실을 겸한 다목적홀. 벽면 서가에 전시된 책들은 독립서점들의 책이다. [지호영 기자]

    설계를 맡은 서현 서울대 건축학부 교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책의 밀림 속을 거대한 책벌레가 꿈틀거리며 관통한 흔적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동쪽에서 서쪽으로 책벌레가 뚫고 들어간 서림(書林)을 따라 걷노라면 그 끝에 뭐가 나올까 궁금해진다. 그림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발견한, 과자와 사탕으로 이뤄진 집이라도 나올 것만 같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회색 일체형 철골구조로 서가의 양옆 끝에는 빨강, 파랑, 노랑으로 포인트를 준 철문이 도열해 있다. 

    높이에 따라 6~10단으로 구성된 철제 서가를 옆에서 본 모습.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아치형 통로가 멀찌감치 보인다.

    높이에 따라 6~10단으로 구성된 철제 서가를 옆에서 본 모습.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아치형 통로가 멀찌감치 보인다.

    동서 축 철제 서가와 남북 축 열람실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그때 그때 주제별로 큐레이션된 책을 만날 수 있다.

    동서 축 철제 서가와 남북 축 열람실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그때 그때 주제별로 큐레이션된 책을 만날 수 있다.

    동서 축 철제 서가의 끝 벽면에 수백 권의 책으로 이뤄진 
‘절대반지’를 만날 수 있다. 원래 설계상으로는 또 다른 책의 숲을 담아낼 대형유리가 설치될 공간이었다. [지호영 기자]

    동서 축 철제 서가의 끝 벽면에 수백 권의 책으로 이뤄진 ‘절대반지’를 만날 수 있다. 원래 설계상으로는 또 다른 책의 숲을 담아낼 대형유리가 설치될 공간이었다. [지호영 기자]

    또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남쪽 유리창엔 블라인드가 처져 있지만 맞은편 북쪽 유리창으론 한강공원의 녹음이 쏟아져 들어온다. 헌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초록빛 풍광이다. 하지만 사실 북쪽 유리창 너머에 회색빛으로 뒤덮인 공영주차장이 있다는 건 영업비밀(?)이다. 이를 감추고자 북쪽 벽을 잔뜩 높이고 세로로 긴 유리창을 뚫은 것은 그 자신이 책벌레로 유명한 해피 포터의 마법이라고 우리 의심치 말기로 하자. 

    5월에는 고래 배 속 같은 서울책보고의 통로를 런어웨이 삼은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사진 제공 · 서울책보고]

    5월에는 고래 배 속 같은 서울책보고의 통로를 런어웨이 삼은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사진 제공 · 서울책보고]

    이렇게 마법의 숲 끝자락에선 수백 권의 헌책으로 이뤄진 거대한 ‘절대반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봐도 “어서 나를 끼워봐”라는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곁에 서 있던, 살짝 머리 벗겨진 해리 포터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원래 건축설계도에는 이 벽면 전체에 대형거울이 설치될 예정이었죠. ‘책의 숲’ 너머에 또 다른 ‘책의 숲’이 펼쳐지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였는데 역시 예산 부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오.” 

    아, 원설계대로 실현됐더라면 정말 신의 한 수였을 텐데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럼 도대체 30억 원이라는 돈은 어디에 쓰인 걸까. 다시 뼈아픈 자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짐이 뭔지 아느냐. 바로 책이란다. 이곳의 바닥이 비어 있는 유수지임을 까맣게 잊고 그 무거운 책의 숲을 만들려 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는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30억 예산 중 바닥 보강 공사로만 10억 원을 쏟아부어야 했단다.” 

    서울책보고 북쪽 유리창. 한강공원의 녹음을 만끽할 수 있다.

    서울책보고 북쪽 유리창. 한강공원의 녹음을 만끽할 수 있다.

    서울책보고 북쪽 문을 나서면 바로 공영주차장이 나오는데 이를 살짝 가려준 것이다.

    서울책보고 북쪽 문을 나서면 바로 공영주차장이 나오는데 이를 살짝 가려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층수도 높일 수 없었고, 기존 창고의 뼈대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오로지 오래된 책을 품고, 더듬고, 음미할 수 있는 공간에 충실한 건축이 됐다. 또 그러다 보니 20만 권의 장서를 키우고 공급하는 ‘지성의 온실’에 가까운 공간이 됐다. 그 대신 동서 축과 직각을 이루는 남북 축 공간은 ‘소수정예’의 책을 출간하는 독립출판사들의 전시공간 겸 열람실, 그리고 소규모 북 콘서트나 인문학 강의가 펼쳐지는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영주차장 쪽으로 난 서울책보고 후문. 깔끔하게 양철로 된 벽면을 확인할 수 있다. [지호영 기자]

    공영주차장 쪽으로 난 서울책보고 후문. 깔끔하게 양철로 된 벽면을 확인할 수 있다. [지호영 기자]

    서울책보고 위탁경영을 맡은 비엠컴퍼니의 이한수 기획홍보팀장은 “3월 27일 개장할 때 헌책방 25곳이 13만 권의 책을 들여놨는데 5월 말까지 8만 권이 팔려나가면서 추가로 5개 업체가 더 들어와 지금은 장서가 17만 권으로 늘었다”며 “평일은 하루 500명, 주말엔 하루 1000명가량이 찾는 새로운 명소가 됐다”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작품 가운데 가장 비판이 적다’는 서울책보고가 원설계에 더 가까운 ‘마법의 공간’으로 온전히 탈바꿈할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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