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의 심중일언

“고통을 성찰해 타인의 삶을 끌어안는 것이 연극”

연극 ‘비명자들’ 연작의 극작가 겸 연출가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3-26 10: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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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극단 고래]

    [사진 제공 · 극단 고래]

    “괴물 같은 작품이 나왔다.” 

    2017년 11월 극단 고래의 연극 ‘비명자들2’ 초연을 본 극작가 겸 연극평론가 김명화 씨의 평이다. “좀비 판타지류의 만화 같은 설정과 현실의 거대한 고통이 공존하는 작품. 시끄러운 소음이 슬픈 합창이 되고 현실 비판의 서사가 인간 영혼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작품. 거친데도 불구하고 궁극엔 달빛 아래 시가 돼 있는 작품.” 

    대단한 찬사다. 도대체 어떤 연극이길래. 이 연극은 기존 좀비물과 전혀 다른 한국적 좀비를 탄생시켰다. 지극한 내면의 고통으로 영혼이 증발된 채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비명자(screamer)다. 

    단순히 비명만 지르는 것이 아니다. 반경 4km 내에 있는 사람들은 비명자의 끔찍한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 연극에선 ‘고통의 방사(放射)’라고 표현한다. 설상가상으로 비명자에게 위해를 가하면 가해자를 포함해 반경 4km 내 사람들에게 똑같은 위해가 닥쳐온다. 비명자와 접촉하면 큰 고통이 유발된다. 그래서 좀비처럼 공포와 고통을 안겨주지만, 그렇다고 좀비처럼 함부로 죽일 수도 없는 존재다. 한마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좀비’다.

    ‘한국적 좀비’의 탄생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지난해 12월 재공연된 ‘비명자들2’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비명자들1’이 3월 22~3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연극으로선 드물게 창작 단계에서부터 3부작으로 기획됐는데 2년여 만에 두 번째 작품을 무대화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고통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생각에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가는 현대인에게 고통이란 화두를 던진다. 이를 쓰고 연출한 이해성(50) 극단 고래 대표를 무대 세팅 작업이 한창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이 대표는 중앙대 국문과 출신으로 1992년 연극배우로 먼저 데뷔한 뒤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하면서 극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우리 현대인이 좀비처럼 살아가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하다 2013년 무렵 좀비물을 연극무대로 한번 옮겨보자 싶었습니다. 그 좀비를 기존 익숙한 존재로 할 것인가, 차별화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비명을 지르는 존재’가 떠올랐습니다. 그 비명이 고통을 강제하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딱히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등장했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파고들어가면서 세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왜 1부부터 시작해 2, 3부로 차례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 이야기인 2부부터 시작하게 됐을까. 처음부터 기획한 게 아니라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비명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다 보니 연극 한 편으론 다 담아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부 내용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에 그 중심으로 써내려가면서 그 전사(前史)로서 1부와 그 뒷이야기로서 3부까지 구상했습니다. 의도적 기획이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의 운명이란 생각도 듭니다. ‘비명자들2’에 출연한 배우 대다수가 ‘비명자들1’에도 출연하는데, 캐릭터 구축을 위해 그 배우들이 구상했던 개별 캐릭터의 전사도 함께 녹여 넣어가면서 이번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비명자들2’는 좁은 국토에 인구가 밀집한 한국에서 비명자 발생이 초래하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 대응하려고 세워진 ‘파사현정연구소’의 윤리적 난관에 초점을 맞췄다. 파사현정(破邪 顯 正)은 삿된 것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르라는 부처의 가르침에서 나온 표현이다. 고통을 견뎌내는 특별한 불교 수행법을 연마한 이 연구소 대원들은 비명자가 발생했을 때 현장으로 출동해 비명자를 제거하는 파사팀, 그리고 그 후방 지원과 비명자에 대한 의학연구를 맡는 현정팀으로 나뉘어 있다. 

    파사팀 팀장인 박요한은 비명자의 목을 꺾어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다른 대원들은 비명은 견딜 수 있어도 비명자와 접촉까지는 견뎌낼 수 없다. 요한은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을 못 느낄 뿐 아니라, 비명자와 접촉하는 순간 그들의 영혼과 교감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극진한 연민의 감정으로 비명자의 목을 꺾어 고통에서 해방시켜준다. ‘파사법’이라 에둘러 표현하지만 제3자의 눈에는 살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현정팀 팀장인 이보현은 새로운 해결책 모색을 위해 티베트로 떠나지만 비명자를 죽이라는 중국 당국에 항거하다 학살되는 티베트인들을 목도한 뒤 귀국해 결국 그 자신이 비명자가 되고 만다.
     
    요한은 그런 보현의 목을 과연 꺾을 것인가. 비극적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던 엔딩은 감동적 반전으로 끝난다. 비명자가 다른 비명자를 만나면 비명이 잦아들면서 고통의 방사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치명적 고통의 비명이 서로 공명하면 치유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비명자는 영화 속 좀비와 달리 하나하나 속 깊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학교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다 투신자살한 아들을 둔 엄마, 너무 억울해 분신자살한 노동자의 아내, 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리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엄마…. 하나같이 언젠가 신문 사회면에서 본 듯한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그 고통을 떨쳐내려고 극단적 선택까지 감행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비명자가 된다.

    연작 속으로 뛰어든 세월호와 김용균

    [사진 제공 · 극단 고래]

    [사진 제공 · 극단 고래]

    “ ‘비명자들2’ 초고를 완성한 게 2013년이었죠.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전이었어요.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공연예술 창작산실 희곡부문에 지원하면서 파사현정연구소에 잠입 취재하는 여기자 세은과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비명자를 페리호 참사의 유족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보기 좋게 떨어졌고 2년 뒤인 2016년 다시 지원했는데 또 떨어졌어요. 제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떨어진 게 아닌가 의심도 했는데, 조사위원회 보고를 보니 희곡 완성도가 부족해 떨어진 게 맞더라고요.(웃음) 그러다 2017년 극단 고래가 (서울 광진구에서 운영하는) 나루아트센터 상주 단체가 돼 그해 말 초연 무대를 가졌고 지난해 12월 앙코르 공연을 하면서 군더더기를 덜어내 완성도를 많이 끌어올렸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비명자들1’은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부문에 선정돼 이렇게 무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는 빠져 있다 연극 속으로 빨려 들어간 참담한 현실은 세월호의 비극만이 아니다. ‘비명자들1’에는 화력발전소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로 석탄 운반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 씨의 사연도 녹아들어가 있다. 

    “가슴 아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비명자의 소재를 계속 제공한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사연들을 연극 속에 계속 녹여 넣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극은 허구라는 점에서 관객들이 우화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실명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선 비명자가 어떻게 발생했으며 파사현정연구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를 소개한다. 특히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했던 요한과 가족사의 아픔을 딛고자 티베트로 구도여행을 떠났던 보현이 어떻게 비명자 문제에 관여하게 되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러면서 전편에 여럿 등장하던 비명자의 문제는 ‘세월호’와 ‘김용균’으로 압축된다. 

    ‘비명자들1’은 ‘비명자들2’와 수미쌍관의 병행구조로 전개된다. ‘비명자들2’의 첫 장면이 보현이 티베트에서 목도하게 되는 학살을 담아낸다면 ‘비명자들1’은 요한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목도하는 학살로 시작된다. 또 ‘비명자들2’에서 파사법의 합법화를 둘러싼 청문회의 풍경이 풍자적으로 펼쳐진다면 ‘비명자들1’에선 요한이 비명자를 처음 파사한 사건에 대한 법정 공방이 코믹하게 전개된다. 

    “아프가니스탄과 티베트라는 두 지점은 지구 차원에서 대표적인 폭력이 발생하는 상징적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자본주의 끝자락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장소라면, 티베트는 공산주의 말단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장소인 거죠. 비명자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폭력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 상징적 장소를 꼭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또 타인에게 고통을 강제하는 비명자가 실제 출현한다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지금 현실에 비춰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소하고 치유할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타인의 고통을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환기케 하고 싶었습니다.”

    불교적 수행과 접목한 연기 메소드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연극에는 사성제, 팔정도처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불교적 사유와 수행 방법이 대거 등장한다. 훗날 파사현정연구소가 되는 고통연구소의 소장 무진장은 현실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자발적 파계승으로 그려진다. 

    “우리 극단은 연습을 시작하기 전 꼭 108배를 하고 한 시간씩 명상의 시간을 갖습니다.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연기 메소드의 일환으로 불교의 수행법과 명상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죠. 연극의 본질이 불교적 수행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극이란 게 결국 내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이뤄집니다. 불교적 수행 역시 내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통해 타인을 끌어안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비명자’들 연작에 등장하는 불교적 수행법은 저 자신과 우리 단원들의 그런 수행 및 명상의 산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비명자들’ 연작의 또 다른 특징은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총체극이라는 점이다. 박석주 음악감독이 작곡한 창작곡을 토대로 연주자 5명의 라이브 연주에 맞춰 30명 안팎의 배우가 박이표 안무가가 공들여 조율한 몸동작으로 연기를 펼친다. 2010년 창단된 극단 고래는 ‘빨간시’와 ‘사라지다’ 같은 대표작마다 20명 넘는 출연진을 자랑한다. 고래사냥을 해도 될 만큼 많은 배우를 출연시키는 이유가 있을까. 

    “사실 제가 배우로 연극을 시작했기 때문에 배우들을 훈련시키는 데 무대만큼 좋은 것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단원들에게 골고루 출연 기회를 주고 싶은 것도 있죠.(웃음) 거기에다 ‘비명자들’ 연작의 경우 비명자의 고통을 무대언어로 담아내야 하고, 그 고통이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퍼져가는 것을 역동적으로 담아내려면 총체극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석주, 박이표 두 분과 컬래버레이션을 하면서 평생 함께할 지음(知音)을 만났다 할 만큼 감사한 작업이 되고 있습니다.” 

    극단 고래는 2020년 창단 10주년을 맞는다. 그 기념작으로 발효 중이라는 ‘비명자들3’에는 어떤 내용이 담기게 될까. 

    “이번 공연이 끝나면 절에 들어가 몇 달간 집필에 매달릴 생각입니다. 현재는 ‘DMZ(비무장지대)’와 ‘학살’이라는 2개의 키워드만 있을 뿐 사실 백지 상태에 가깝습니다. ‘비명자들2’에서 비명자를 모아두면 그 고통이 중화된다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비명자 전용 수용소가 생길 테고, 인적이 드문 DMZ가 그 장소입니다. DMZ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접점이라는 점에서 티베트, 아프가니스탄과는 또 다른 폭력의 지점입니다. 그렇게 집결시킨 비명자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음모와 이를 막으려는 분투 속에서 관객들이 폭력과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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