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6

2019.02.15

김상미의 와인 포 유

우연히 들른 피자집에서 경험한 환상의 맛

이탈리아 토스카나 와이너리 투어기

  • 와인칼럼니스트

    sangmi1013@gmail.com

    입력2019-02-18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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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몬탈치노의 다양한 파스타와 로소 디 몬탈치노 와인. (왼쪽) 언덕 위에 우뚝 선 카스텔로 반피 고성. [사진 제공 · 김상미]

    이탈리아 몬탈치노의 다양한 파스타와 로소 디 몬탈치노 와인. (왼쪽) 언덕 위에 우뚝 선 카스텔로 반피 고성. [사진 제공 · 김상미]

    2월 초 이탈리아 피렌체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 행선지인 토스카나주 시에나 쪽에 눈이 많이 왔으니 렌터카를 빌릴 때 스노체인을 챙기라는 것이었다. 지중해 연안은 겨울이 우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따뜻하기로 유명한 토스카나에 눈이라니, 당황스러웠다. 설 연휴를 맞아 와인을 사랑하는 지인들과 함께 떠난 ‘토스카나 현지 음식과 와인 즐기기’ 여행은 이렇게 궂은 날씨 속에서 시작됐다.

    소도시 알린 레드와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반피 와이너리의 와인 숙성실. [사진 제공 · 김상미]

    반피 와이너리의 와인 숙성실. [사진 제공 · 김상미]

    공항을 떠나 시에나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고도가 높아지면서 귀가 먹먹해졌다. 이탈리아는 아펜니노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내륙으로 갈수록 산악지형이 펼쳐진다. 시간은 밤 11시를 넘고 길도 낯선데 비까지 내려 운전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내 내리는 비로 1년 동안 포도가 자라니 화창한 날씨가 아니라고 속상해할 일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숙소 창밖을 보니 드넓은 포도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목적지는 시에나에서 남쪽으로 차로 약 1시간 거리인 작은 마을 몬탈치노(Montalcino)였다. 이곳은 산지오베제 포도 품종 중 최상급으로 꼽히는 산지오베제 그로소(Sangiovese Grosso)로 만든 레드와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로 유명하다. 산지오베제 그로소의 옛 이름이 브루넬로이기에 지금도 이 고장의 와인을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라고 부른다. 브루넬로 와인은 타닌이 많아 긴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와이너리에서 최소 2년 4개월간 숙성시킨 뒤 출시된다. 하지만 제대로 맛을 즐기려면 병입 상태에서 추가 숙성을 시켜야 하므로 빈티지로부터 6~7년 뒤 마시는 것이 좋다. 

    몬탈치노를 한 시간 정도 천천히 둘러본 뒤 한 식당에 들어가 파스타를 주문했다.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주인은 ‘로소 디 몬탈치노(Rosso di Montalcino)’를 가리켰다. 로소는 브루넬로보다 짧게 숙성시켜 신선함을 즐기는 와인이다. 비싼 브루넬로 대신 저렴한 로소를 권해 의외였지만 음식과 함께 와인을 맛보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파스타의 고소하고 기름진 맛과 로소의 풍부한 과일향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음식과 가볍게 즐기기에는 상큼한 로소가, 깊은 풍미를 감상하며 마시기에는 브루넬로가 좋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몬탈치노에서 차로 약 20분을 달려 와이너리 반피(Banfi)에 도착했다. 1978년 설립된 반피는 브루넬로 와인의 대중화와 혁신을 이끈 와이너리다. 명품 브루넬로인 ‘포지오 알레 무라(Poggio Alla Mura)’를 비롯해 ‘수무스(Summus)’ 같은 슈퍼투스칸, 다양한 키안티 와인, 이탈리아 북부에서 생산하는 모스카토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반피의 상징은 언덕 위에 우뚝 선 카스텔로 반피(Catello Banfi) 고성이다. 와인 레이블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고성은 30km2에 이르는 포도밭을 내려다보고 있다. 와이너리를 둘러본 뒤 고성에서 와인을 시음했다. 스낵으로 제공된 말린 자두와 반피의 레드 와인이 무척이나 잘 어울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토스카나의 와이너리는 방문객을 받지 않는 곳이 많지만 반피는 웹사이트에서 예약하면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중세 도시 시에나와 다양한 와인들

    반피의 와인숍. (왼쪽)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다양한 식재료와 슈퍼투스칸 와인들. [사진 제공 · 최장근, 사진 제공 · 김상미]

    반피의 와인숍. (왼쪽)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다양한 식재료와 슈퍼투스칸 와인들. [사진 제공 · 최장근, 사진 제공 · 김상미]

    여행 두 번째 날엔 중세의 그윽함을 간직한 도시 시에나로 향했다.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걷다 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시에나 중심에 위치한 캄포 광장은 바닥이 비스듬해 등을 대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기 좋다는데, 우리가 간 날엔 비가 많이 왔다. 맛집을 찾아 나서기도 어려울 정도의 폭우여서 한 끼 정도는 피자로 간단히 때우자며 광장의 피자집으로 들어섰다. 

    피자를 이것저것 주문하고 와인으로는 ‘베르나키아 디 산 지미냐노(Vernaccia di San Gimignano)’를 골랐다. 산 지미냐노는 시에나와 피렌체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이곳 특산물인 베르나키아 화이트 와인은 레몬, 자몽 등 시트러스 계열의 상큼한 과일향이 풍부하다. 관광지 피자집이라 기대를 안 했는데, 피자 맛이 하나같이 일품이었다. 알고 보니 시에나의 유명 베이커리 난니니(Nannini)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베르나키아 와인과 피자의 궁합은 환상적이었다. 피자의 기름진 맛을 베르나키아가 개운하게 씻어줬고, 다시 피자로 손이 갔다. 일곱 명이 피자 일곱 판을 말끔히 먹어치운 뒤 누군가가 말했다. “그거 알아요? 우리 중 누구도 피클을 찾지 않았어요.” 

    시에나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로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와인숍에서 슈퍼투스칸을 구매해 숙소에서 느긋하게 즐기기로 했다. 슈퍼투스칸은 토스카나의 전통을 파괴하고 탄생한 혁신적인 와인이다. 토스카나는 전통적으로 산지오베제라는 적포도에 백포도를 섞어 키안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레드 와인은 마시기엔 편해도 품질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에 와이너리들은 산지오베제로만 와인을 만들거나 백포도 대신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또는 메를로(Merlot)를 섞으려 했다. 토스카나 정부가 와인법 개정을 거부하자, 볼게리(Bolgheri) 마을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와인들은 금세 키안티의 명성을 넘어섰고, ‘토스카나에서 만든 위대한 와인’이라는 뜻으로 슈퍼투스칸으로 불리게 됐다. 

    슈퍼투스칸인 ‘레 쿠폴레(Le Coupole)’ 2015년산과 ‘수가릴레(Sugarille)’ 2001년산을 샀다. 영 빈티지와 올드 빈티지의 비교 시음인 셈이었다. 올드 빈티지 구매에는 돈이 제법 들었지만 식료품 구매에는 50유로(약 6만4000원)도 채 들지 않았다. 신선한 빵에 곁들인 햄, 소시지, 올리브는 올드 빈티지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고, 뭉텅뭉텅 썬 모차렐라 치즈와 토마토로 만든 샐러드는 영 빈티지와 즐기기에 그만이었다. 

    토스카나에서는 굳이 맛집과 유명 와인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나 음식이 맛있고 와인이 저렴했다. 이제 남은 일정은 볼게리와 피렌체다. 부디 날이 개기를 기대하며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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