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일자리 분식(粉飾)

세금 들여 만든 공공 단기 일자리의 함정

돈 쏟아부은 20, 60대 취업자 증가…돈 안 쓴 30, 40대는 실업자 증가

  • 입력2018-11-19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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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불 인화물질 제거반원들이 깻단 등 인화물질을 파쇄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산불 인화물질 제거반원들이 깻단 등 인화물질을 파쇄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1 11월 14일 오후.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한 야산에서 10명 남짓한 인원이 억새와 잡풀더미를 쉼 없이 파쇄기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모자와 조끼를 맞춰 입은 이들의 뒷모습만으로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가까이 다가서자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서 연령대를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부지방산림관리청 정읍국유림관리소에서 산불 인화물질 제거반원으로 활동하는 단기 일자리 요원이었다. 인화물질 제거반은 국유림에 인접한 농지에서 나오는 영농 부산물을 제거하는 게 주요 임무다. 짚이나 고춧대, 깻단 등을 태우려다 국유림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정경화 정읍국유림관리소 팀장은 “산림청은 산불 예방 차원에서 인화물질을 제거하고, 농민은 처리 곤란한 영농 부산물을 처리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며 “농민이 직접 처리를 의뢰해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잠시 바닥에 걸터앉아 목을 축이는 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어르신, 힘들지 않으세요. 

    “왜 힘이 안 들겠어.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께….” 

    이번 일자리는 50일 남짓이면 끝나는데요. 

    “그래서? 이것도 없으면 우리는 뭐로 먹고살라고….” 



    일행 중 가장 젊은 이명규(60) 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이든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지, 단기냐, 아니냐가 뭣이 중허요.” 

    이곳에서 일하는 10명 남짓한 인원은 인근 전북 정읍시와 익산시, 완주군 등에서 온 이들이었다. 연령별로는 60대가 가장 많았고, 70대도 더러 있었다. 

    2007년에도 산불감시요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는 최환규(68) 씨는 “일거리가 없으면 만날 집에서 술이나 먹고 누워 있을 텐데, 나라에서 일할 기회를 주니께 나와서 일도 하고, 그만큼 술도 덜 먹어서 건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 투입된 인화물질 제거반원 가운데 최고령은 77세인 김문길 씨였다. 김씨는 “아파트 경비원을 끝으로 일손을 놨다 단기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익산에서 온 이성우(64) 씨는 버스운전기사로 정년퇴임한 뒤 쓰레기 분리수거 작업과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용직 일자리를 구해왔다고 했다. 

    #2 11월 6일 한국농어촌공사 원주지사에서 이선아(25) 씨를 만났다. 숙명여대 경영학과를 다니는 이씨는 최근 5 대 1 경쟁률을 뚫고 한국농어촌공사 원주지사의 체험형 인턴으로 선발됐다. 11월 1일부터 근무하고 있는 이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다른 직원들처럼 주 40시간 일한다. 이씨에게는 4대 보험 가입과 함께 월 160여 만 원의 급여가 지급된다. 연간 100% 지급되는 성과급도 12분의 2 비율로 지급될 예정이다.

    고용률은 떨어지고 실업률은 높아지고

    한국농어촌공사 원주지사에 체험형 인턴으로 채용된 이선아 씨. [지호영 기자]

    한국농어촌공사 원주지사에 체험형 인턴으로 채용된 이선아 씨. [지호영 기자]

    이씨가 맡은 일은 주로 농지수탁 업무다. 농지연금 대상 어르신이 찾아오면 연금제도를 설명하고, 연금 신청 서류 작성도 돕는다. 농지연금 신청자를 상대로 만족도를 묻는 설문조사도 진행한다. 

    그는 “공공기관 취업을 목표로 구직활동을 하던 중 체험형 인턴 공고가 나와 지원했다”며 “두 달짜리 단기 인턴이지만 요즘 공공기관 인턴은 ‘금턴’으로 부를 정도로 귀해 여기 인턴을 한다고 하니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말했다. 

    업무 자체는 단순하지만 이씨는 나중에 경력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가 머문 1시간여 동안 이씨를 찾아오는 민원인은 없었다. 

    원주지사 측은 “육아와 출산휴가에 들어간 직원이 2명 있어 결원을 보충하는 대신 두 달짜리 체험형 인턴을 선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매월 발표하는 ‘고용동향’은 우리나라 일자리 현황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지표다. 11월 14일 통계청이 발표한 10월 고용동향을 압축하면 이렇다. 전년 동기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24만 명 늘었다. 그런데 14만 명은 일할 수 있지만, 나머지 10만 명은 학업, 육아 등으로 당장 일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 일할 의욕이 있는 14만 명 가운데 6만 명은 일자리를 구했는데 8만 명 가까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놀고 있다. 

    일자리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이처럼 일할 수 있는 인구 증가 수보다 취업자 수가 적기 때문이다. 올해 취업자 증가폭은 7월 5000명, 8월 3000명을 기록한 이래 4개월째 10만 명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분야별로는 서민이 가장 많이 종사하는 숙박·음식점업에서 9만7000명이 줄었다. 연령별로는 60세 이상에서 24만3000명이 증가했고 20대에서 6만1000명, 50대에서 6000명 늘어난 반면, 30대와 40대는 각각 7만4000명, 15만2000명이 줄었다. 30대 취업자 수는 13개월째 줄었으며, 40대 취업자 수는 36개월 연속 감소했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고용률이 하락하는 와중에 20대와 60세 이상에서 취업자 수가 크게 늘어난 이유는 뭘까.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올해 안에 5만9000개 단기 일자리를 만들어내겠다는 정부의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 만들기 사업의 결과가 수치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청년실업 완화와 재해 예방 등 지원이 시급한 일자리 2만2000개를 만들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공공기관 체험형 인턴 5300명, 정부부처·공공기관 행정업무 2300명, 생활방사선(라돈) 측정서비스 1000명, 산불·전통시장 화재 감시원 1500명 등이다. 대국민 공공서비스 제고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자리도 1만9000개 만들 계획이다. 독거노인 전수조사 2500명, 교통안전시설물 실태조사 2000명, 전통시장 환경미화 1600명, 국립대 에너지절약 도우미 1000명 등이다. 이 밖에도 어르신과 실직자,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 소득지원 일자리로 1만8000개를 만들고 고용·산업위기지역 희망근로 사업에 1만1000명을 채용하며, 농한기 농촌 생활환경 정비에 5000명, 어항·해양 환경정화에 1000명 등이 투입될 예정이다. 

    공공기관의 구체적인 일자리 창출 계획을 살펴보면 이렇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도시재생사업 후보지역 조사 및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 468명, 임대주택 거주자 실태조사 200명, 드론 활용한 토지 조사 120명, 주택행정정보시스템 운영 95명, 임대주택 하자서비스 외부용역 확대 시행 400명, 돌봄사원 400명, 맞춤형 주거복지 확대 230명 등 1913명의 단기 일자리를 만들 계획을 밝혔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는 자영업 상권분석 지원 540명, 소상공인 제로페이 홍보 960명의 단기 일자리를 만들 예정이고, 근로복지공단도 산재근로자 가입정보 관리 570명, 일자리안정자금 지원 168명, 산재보험 부정수급 관리 150명 등 888명의 단기 일자리 제공 계획을 세웠다. 꼭 필요한 일자리라기보다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사업이 대부분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사업들

    정부가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 만들기에 급히 나선 것은 올해 들어 9개월 연속 취업자 증가폭이 10만 명 이하에 그치면서 고용 부진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올해 취업자 증가폭은 1월 33만4000명이었다. 하지만 2월 10만4000명으로 10만 명대를 기록했고, 5월에는 7만2000명으로 10만 명 선마저 무너졌다. 7월과 8월에는 각각 5000명, 3000명으로 두 달 연속 1만 명을 밑돌았다. 특히 월평균 취업자 수는 계절적 특성에 따라 동절기에 상대적으로 크게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올해 같은 고용 부진이 동절기까지 이어질 경우 최악의 고용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정부가 부랴부랴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 만들기에 나선 이유가 그 때문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기재부) 장관은 10월 18일 기재부 국정감사에서 “전반적으로 좋은 일자리가 생기면 좋겠지만, 엄중한 상황이라 경력 관리나 자기계발을 위해 (단기 일자리도)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40대 실업률 1.8 → 2.4%로 상승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월 2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일자리 창출 지원 방안 등에 대해 모두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월 2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일자리 창출 지원 방안 등에 대해 모두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그러나 이 같은 단기 일자리를 두고 ‘공공기관을 압박해 채용을 종용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면서 야권을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야당이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가 고용 관련 통계 성적표의 악화를 모면하려고 공공기관을 협박하는 ‘일자리 분식(粉飾)’ ‘가짜 일자리’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10월 26일 정부의 일자리 대책에 대해 “마이너스 취업자 수를 막으려고 급조한 것”이라며 “정부는 일자리 통계 분식이나 조작에 불과한 일자리 정책을 하루빨리 거둬야 한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또 “체험형 인턴이나 행정업무 지원 등 단기 알바형 일자리를 만들어내면서 긴요한 공공 수요 운운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자유한국당 민경욱 의원도 “한국도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 국토교통부(국토부) 산하 공기업과 공공기관 23개가 10월부터 12월까지 채용했거나 만든 단기 일자리 및 체험형 인턴은 1만2500명으로, 이들에게 지급될 수당이 379억 원에 달한다”며 “국토부가 일자리 수치를 늘리려고 필요하지 않은 단기 일자리를 만들어 세금 수백억 원을 낭비하고 있는 데다, 전체 공공기관이 361개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낭비되는 세금은 수천억 원에 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단기 일자리에 채용된 취업준비생과 나이 든 어르신들은 “기간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기회만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기 일자리가 끝난 뒤에는 똑같은 악순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공공기관을 동원해 단기 일자리 수만 개를 만들어 급한 불을 끄고 있지만, 정작 경제활동인구의 중추라 할 40대 실업자 수는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10월 40대 실업률은 1.8%였으나, 1년 만에 2.4%로 크게 뛰었다. 전체 실업률(3.5%)보다 낮은 수준이라 해도 가파른 실업률 상승 추세를 막지 못하면 또 다른 경기 불안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 사업으로 20대와 60세 이상 취업자 수를 늘린 정부가 앞으로 실업자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30대와 40대를 위해 또 다른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를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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